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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축으로서의 시민, 주인으로서의 시민 <통치론>

by 안테암블로 2024. 12. 1.

1. 권력과 폭력 

 

한 마을이 다른 마을을 공격했다. 그러자 공격을 당한 마을이 물었다. '왜 이런 일을 하시는 겁니까?' 그러자 그가 대답했다. '당신네 마을이 강 건너편에 있었기 때문이오.'

 

인간은 호주머니에서 동전을 꺼내듯 사람을 죽일 수 있다. 그리고 그것에는 어떠한 이유도 필요하지 않다.

 

많은 학자들이 전쟁의 원인에 대하여 연구했다. 그 첫번째 시발점은 전쟁의 이유였다. 학자들이 밝혀낸 대표적인 이유로는 다음과 같다. 영토 소유권, 장자 승계, 이익의 배분, 정의 상실, 불합리한 처우, 개인과 공동체의 위기  등등이 있다. 그러나 곧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었다. 전쟁을 하는 궁극적인 이유는 없다는 사실이다. 다만, 궁극적인 원인이 있었는데 바로 인간 그 자체가 본래 폭력적인 존재라는 것이다. 

 

이 상태를 17세기 철학자는 자연상태라고 불렀다. 대표적인 사상가인 홉스와 존 로크는 이 자연상태에 대하여 각기 다른 의견을 내놓았다. 홉스는 본래 자연상태란 폭력이 난무하는 아비규환으로 보았고 존 로크는 매우 평화로운 상태임을 말했다.

 

나는 한때는 존 로크의 의견에 동의했다. 그야 이 세상 어딘가에 때 묻지 않은 아름다운 자연과 평화를 구유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생각이 이상적이고 매력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러 사례를 접하고 역사를 공부하게 되면서 생각은 점점 홉스의 자연상태 쪽으로 기울었다. 산업혁명 이후로 부유해진 사람들은 점점 공장과 편리한 것이 둘러 쌓인 환경에 염증을 느꼈다. 이들 중 일부는 존 로크의 아름다운 자연상태를 신봉했다. 그래서 원주민들과 접촉하려는 기자나 학자들이 매우 많았다. 그러나 그들이 본 것은 끔찍한 것들이었다. 

 

원주민들끼리는 부족간의 전쟁이 활발할 뿐만 아니라 재미를 위해서도 전쟁을 했다. 죽은 사람의 시신을 갈기갈기 찢어 옷으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영아를 강간하고 여성을 납치하고 임산부를 창으로 찔러 죽이며 노인을 산 채로 불태웠다. 

많은 수의 기자와 선교사 학자들이 원주민들에게 향했다가 살해당하고 운좋으면 불구가 되어 본국으로 송환되었다. 

 

나는 현대인들이 더욱 문명적이고 야만에서 벗어났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1차 2차 세계대전과 일제강점기의 일본, 독일의 나치는 그보다 더했으면 더 했다. 특히 규모면에서 말이다. 베트남전에서 백린탄을 뿌려대는 것이 그들과 무엇이 다르다는 말일까? 민간인의 집에 폭탄을 설치하여 한번에 죽이는 짓이 21세기에도 일어나는 현실이다. 

 

그러나 나는 그럼에도 원주민보다 시민이 더 났다고 생각한다. 

 

시민은 자신의 폭력을 권력으로 바꾸었고 스스로를 경계할 수 있는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마련했기 때문이다. 

 

2. 가축으로서의 시민, 주인으로서의 시민 

국가가 생기기 이전의 상태는 어떤 상태일까? 존 로크의 말처럼 평화가 가득하지만 약간 불균형이 있는 상태 거나 아니면 홉스의 말처럼 피와 살이 난무하는 전쟁터일지도 모른다. 정확한 역사적 진실은 아무도 모르지만 어느 날 현명한 누군가가 개인과 개인 간에 이 상태를 끝내야겠다고 생각한 사람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일종의 '계약'을 맺었다. 자신들을 대표하는 사람에게 처벌할 수 있는 권리를 넘겨주는 대신 서로 개인적으로 처벌하지 않도록 했다. 그리고 그 계약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모여 국가가 탄생했다. 

 

인간은 계약을 통해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인간의 폭력을 양도했다. 이를 통치권 이라 부른다. 통치권이 생겨나서부터 인간은 야만의 상태에서 가까스로 벗어났다. 서로를 길에서 죽이는 것보다 서로가 인정하는 재판장을 두어 그 선택을 따라 처벌을 받는 것을 선택한 것이다. 이러한 조치는 서로의 자유와 재산을 보호하였고 계약 당사자들을 비무장상태로 만들어 불필요한 분쟁을 예방했다. 

 

이 계약에는 두 가지 형태가 있었다. 말 그대로 계약을 집행하는 사람에게 자신의 목숨과 재산을 포함한 '모든 것'을 넘겨주는 경우와 '처벌에 대한 권한' 만 넘겨주는 경우 가 있었다. 전자의 형태로 만들어진 국가가 바로 '군주국'이며 후자가 '공화국'이다. 인류 대부분의 역사에서는 군주국이 대부분이었다.

 

군주국은 개인의 자유와 재산 뿐 아니라 목숨까지도 가져갔다. 모든 인간은 '주인'과 '노예'로 분류되었다. 옛 역사서와 이야기 책에는 군주와 신민으로 포장되었지만 사실은 재산이 있는 노예 (그러나 군주의 재산을 관리하며 사유재산이 없는)의 국가들이 있었다. 

 

그나마 공화국이 성공적으로 작동된 곳은 그리스의 '아테네'정도였다. 나머지의 공화정은 부분적인 군주국의 형태였고 공화국이라 불리기에는 무리가 있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그 수준은 군주국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흔히 '생득적 민주주의'로 대표되는 아테네의 민주주의는 개인의 폭정의 위험이 있는 군주국과는 달리 민중의 폭정이 격심했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민주주의를 경멸했다. 소크라테스는 지식과 경험에 상관없이 모든 민중이 동일한 표를 받는 것이 옳지 않다 여겼고 실제로 무분별 한 투표로 인해 많은 선량한 사람들이 아테네에서 추방당하여 다시는 고향 땅을 밟지 못했다. 결국 군주정이든 공화정이든 결국 개인의 노예가 되거나 민중의 노예가 되는 극단적인 형태를 지니게 되었다.

 

명예혁명 이후 입헌군주제와 자유 민주주의가 등장하기 전까지 인간은 주인과 가축으로 분류되는 비참한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3. 자유와 주인의식

왕들의 권위가 약해지고 상업이 강해지며 인간들이 사유재산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자유를 알게 된 시민들은 더 이상 신민으로 돌아가려 하지 않았다. 존 로크의 영향으로 입법부 사법부 행정부의 삼권분립이 등장했고 서로를 견제하였다. 그곳에는 모든 것을 통괄하는 왕이 존재하지 않았다. 설령 왕이 있더라도 삼권의 간섭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사람들은 마침내 자유를 모두 되찾은 듯 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아직도 많은 국가는 왕정의 형태를 띄고 있으며 자유도 없다. 군주국의 19세기 형태인 공산주의 또한 마찬가지다. 심지어 자유 민주주의 속에서도  권력자들은 시민을 가축화하려는 시도를 몇 번이 고는 했으며 지금도 진행 중이다. 군사력으로, 돈으로, 언론을 통한 선동과 날조로, 특정한 카르텔을 구성하며 이웃의 주인이 되는 꿈을 꾸고 있다. 

 

그렇다면 어떨 때 시민은 가축이 되고 어떨 때 주인이 될까? 바로  스스로가 주인임을 잊었을 때이다. 모든 민주시민은 스스로가 권력의 주체이며 단지 그 통치권을 대표자에게 위임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렇기에 통치자가 불공정하게 권력을 행사할 경우 언제든 그 권한을 회수할 수 있으며, 최악의 경우 싸워야만 한다.

 

국가가 존재하는 이유는 나의 자유와 나의 재산을 보호해주기 위해서 더 큰 목적으로는 시민의 행복을 위하여 존재한다. 

권력이란 우리가 누군가를 지배하고 지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스스로의 주인이 되기 위하여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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