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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인한 리더 vs 온화한 리더 <콘스탄티노플 함락>

by 안테암블로 2024. 7. 1.

 
1. 담을 넘는 야망

 
능력이 있고 열정이 넘치는 젊은이를 가두어 두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마음속에 끊는 야망을 분출할 방법이 없다면? 당연히 스스로를 비관할 수밖에 없다.

바로 메흐메트 2세가 그런 사람이었다.

그는 아버지 무라트 2세와 달랐다. 아버지 무라트 2세는 위기에 처한 나라를 지켜달라는 신하들의 간절한 부탁에  불과 13살에 즉위하여 폴란드- 헝가리 군을 꺾고 술탄으로서의 입지를 다졌다. 
 
반면 메흐메트 2세는 아버지와는 다른 사람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노예인 데다. 술탄의 총애를 받지 못했으며,  그의 위로는 형제가 둘이 있었기에 그에게 관심을 가져주는 사람은 없다시피 했다.  그러다  술탄 후보였던 둘째가 의문의 암살자 에게 살해당하며 유일한 후계자가 되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메흐메트 2세는 그토록  꿈에 그리던 술탄 자리를 얻었으니 운이 좋아지나 싶었다. 
 
그러나 막살 앉은 술탄의 자리는 가시방석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부재 시의 아버지를 대신해서 섭정을 맡았지만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그의 곁에는 재상 할 릴 파샤가 보좌관이라는 명목으로  감시를 하며 사사건건 간섭하며 지시를 했다. 
 
여기까지는 괜찮을 수도 있었다. 그는 아직 어렸고, 이제 시작이었으니까.
 
메메드 2세는 포기하지 않고 감시역인 할릴 파샤에게 선생님이라 부르며  극진히 따랐다.
 
그러나 섭정을 맡은지 불과 2년도 되지 않아 아버지가 돌아와 다시 술탄자리에 앉아버렸다. 일말의 통보도 없이 말이다. 이유는 재상 할 릴 파샤를 포함한 대신들의  청원이었다. 

"만약 당신이 파디샤이시라면, 이 어려운 시기에 당신의 군대를 이끄는 것이 우리 전통에 맞는 일일 것입니다.
하지만 만약 내가 파디샤라면 그대에게 명하노니 즉시 돌아와 나의 군대를 이끌도록!"

 
아무도 자신을 따라주지 않는다는 생각에 메메드는  자존심에 크게 상처를 받았다.
 
이때부터 메메드는 일절 전쟁에 관심을 가지지 않고 여색, 남색에 빠져들어 마음을 달랬다. 그런 와중에 마음에 없는 결혼을 하였지만, 아이는 없었고 자신의 유일한 지지자인 어머니가 사망했다.

거듭되는 절망 속에서 그는 현실을 잊기 위해  더 깊이 쾌락을 탐닉하며 방탕한 생활을 이어갔다.

하렘의 모습




그러던 5년째 열 아홉살이 된 그는 아버지의 사망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는 아버지의 사망소식에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즉시 흑마를 탄 채 수도로 달려갔다. 그리고 1451년 2월 18일 술탄의 자리에 앉게 되었다.

권좌에 앉은 젊은 술탄의 주위에는 공포스러운 분위기가 자리 잡고 있었다. 재상들은 자신들이 쫓아낸 망나니 후계자가 돌아온 것을 보고 숨소리 하나 편히 내지 못했다. 
 
그때 술탄이 입을 열었다. 
 
"대신들은 왜 나에게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는가? 자기 자리로 돌아가라" 
 
대학살극이 벌어지리라는 예상과는 달리 다행이도 메흐메트 2세는 별다른 복수나 처벌을 하지 않았고 안도의 분위기가 흘렀다. 
 
그러나 사람들은 알지 못했다.
 
메흐메트2세가 보낸 암살자에 의해  술탄의 어린 이복동생이 욕조에서 차갑게 식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렇게 메흐메트2세가 정식적으로 술탄의 자리에 오른 뒤로 그는 숨겨왔던 자신의 야망을 본격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했다. 
술탄으로 지내던 어느날 그는 마룻바닥에 두루마리로 된 여러 도면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것은 어떠한 벽이었는데 

장장 좌우로 6킬로미터, 높이는 12미터, 96개의 탑이 20미터 간격마다 있는 3중으로 되어있는 일종의 성벽이었다. 
 
바로 1100년간 침략자를 허용하지 않는 난공불락의 도시  '콘스탄티노플'이었다. 


 
그 뒤 20차례의 치열한 공방전 끝에  1453년 콘스탄티노플은 무너지고 오스만 제국의 수도 '이스탄불'이 탄생했다 
 
2. 사랑받는 사람이 되는 것과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것 

콘스탄티노플 공방전

 
메흐메트 2세는 지금도 터키인이 존경하는 인물 중 한 명이다. 아직도 터키의 아버지들은 자기의 아이들에게 "너는 메흐메트 2세처럼 되어야 한다."라고 가르친다.

물론 그가 오스만 제국의 유구한 전통 '형제살해법'을 도입한 인물이며 암수와 간계, 거짓과 기만을 저질렀다는 진실은 함구하고 말이다.
 
그에 비해 비잔틴의 마지막 황제였던 콘스탄티누스에 대해서는 악랄하고 비열한 황제로 덮어씌운다.
여기서 역사의 재미있는 일면이 드러난다.
 
'권선징악은 동화 속에서나 나오는 환상'이라는 사실이다. 
 
실제로 메흐메트 2세의 적이자 로마의 마지막 황제 콘스탄티누스는 거의 모든 인물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존경할 만큼 훌륭한 인품을 가졌다. 후대의 역사학자들 또한 입을 모아 그에 대해 '그는 유능한 행정가이자 단 한 번의 불명예스러운 행동을 한 적이 없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게다가 강한 책임감을 지녀  도망칠 기회도 마다하고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성벽 위에서 싸우며 장렬하게 전사했다. 사람을 밥먹듯 죽이며 아버지의 죽음에 몰래 웃음짓는 누군가와는 다르게 말이다. 

콘스탄티누스 11세

" 제국 없는 황제로 사는 것은 하느님께서 금하신다. 짐의 도시가 스러지면 짐도 함께 쓰러질 것이다.
도망가고 싶은 사람은 할 수만 있으면 목숨을 구하고, 죽음을 직면할 각오가 된 사람은 짐을 따르라!"


-콘스탄티누스 11세-

 
그래서 콘스탄티노플의 몰락은 여러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모두에게 존경받는 황제 콘스탄티누스와 모두가 두려워하는 술탄 메흐메트 2세,

도덕적이고 청렴한 황제 콘스탄티누스와  잔인하고 영악한 황제 메흐메트 2세라는 서로 정 반대의 평가와 삶의 배경을 가진 두 명의 리더가 격돌한 것이기 때문이며,

도덕적인 사람이 이긴다는 통념과 달리 도덕을 가진 자가 비도덕한 자에게 멸망당한 사례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콘스탄티누스는 지고 말았을까?
 
바로, 콘스탄티누스는'두렴움의 대상보다 사랑받는 대상'이었으며 , 황제 그 자신이  '잔인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먼저 '사랑받는 군주' 콘스탄티누스 11세의 경우를 보자 
 
전쟁 직전의 비잔틴 제국은 힘을 가진 국가가 아니었다. 그렇기에 투르크를 막아내기 위해서는 서유럽에 군사원조를 요청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는데 여러 국가에 사자를 보내도 아무도 도우러 오지 않았다.
 
(먼저 제노바인데, 제노바는 원조를 하기에는 너무 약했다. 베네치아 또한 이탈리아에서의 내전으로 인해 어려운 상황이었다. 베네치아에게 보낸 사자로부터 돌아온 답변은 '공조 체제를 이루도록 노력하겠다.'는 실리 없는 소식이었다. 다른 국가인 나폴리는 호시탐탐 황제의 자리를 노리고 있었으니 부탁할 수도 없었다. 신성로마제국은 헝가리와 전쟁 중이었기에 군사를 파견할 상황이 아니었다. )
 
이 국가들이 비잔틴의 도움을 거절한 이유는 뻔했다 콘스탄티누스의 상황보다 자신들의 상황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런 일은 '사랑받는 군주'들에게서 곧잘 일어난다. 잘 나갈 때는 황제가 은혜를 베풀면 좋은 마음으로 따른다. 그러나 그것은 언제까지나 위험이 닥치지 않을 때의 이야기다.

사랑은 감사하는 마음에서 생긴 일종의 유대감인데, 본래 인간은 비열하여 자신에게 불이익이 생길 것 같으면 언제든지 유대감을 버린다.

-<군주론> -

 
이런 상황에서 황제가 생각한 오스만 군에 대한 유일한 희망은 동서 로마의 통합이었다.

그러나 수도사들은 "황제가 면류관을 쓰는 걸 본다면 차라리 콘스탄티노플이 지배되는 것을 보겠다.!"며 광장에 모여 시위를 했다.

이상과 달리 '사랑으로 다스리는' 비잔틴 제국은 속이 썩어 문들어지고 있었다. 
 
반면,  '두려운 군주' 메흐메트 2세는 어땠을까?
 
메흐메트 2세의  오스만 제국 또한 콘스탄티노플 못지않은  균열이 있었다.  그런 그가 술탄의 자리에 오르고 가장 처음으로 한 일은 자신의 이복동생을 암살하는 일이었다.

이복동생은 아버지의 총애를 받았고 훗날 대신들이 언제든 자신을 떠나 새로운 세력을 만드는 것을 막기 위한 비정한 결단이었다.  그다음으로는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콘스탄티노플 연안에 요새를 짓는 것을 강행했다.

아예 전쟁을 시작해 버려 그들이 따를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본격적으로 전쟁을 시작하기 전까지 뜻을 아는 자들을 끊임없이 죽여댔다. 
 
좋은 말로 타이르듯  균열을 막으려 했던 인내심 있던 콘스탄티누스와 달리
 
메흐메트 2세는 오직 '공포'로 단숨에 제국의 균열을 메꾸었다.

-콘스탄티노플 점령 후 일어나 사흘간의 대학살 -
군주가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있을 때나 대규모 병력을 지휘할 때는 잔인하다는 평판에 대해 전혀 신경 쓰지 말아야 합니다. 잔인하다는 평판을 얻지 못한 군주는 병사들을 일치 단결시켜 규율을 잡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군주론> 17장 사랑받는 대상이 되는 것과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것에 대하여中-

 
그 결과는 전쟁의 순간에도 그대로 드러났다.

황제가 '사랑'으로 통합하려 했던  제국은 전쟁이 시작되자 제노바와 베네치아 동 로마 서 로마의 내분을 일으켰고 회의시간에 서로를 비난하기 바빴다. 

이런 속에서 베네치아인과 제노바인의 해묵은 반감이 다시 폭발했다..... 그런 놈들이니까 언젠가는 혼자 살아보겠다고 도망갈 거라는 생각을 버릴 수 없게 된 것이다. 그 때문에 마침내 베네치아 상선처럼 제노바 상선도 닻과 돛을 떼어내고 황제에게 바치는 것이 어떻겠냐는 제안이 나오게 되었다. 제노바인들은 모욕감에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본문 188p中

 
반면 공포로 통합된 메흐메트 2세의 군대는 달랐다. 

시동만이 스물한 살 젊은이의 차가운 분노를 알아차린 것은 아니었다.
대신 중 한 사람인 자가노스 파샤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격한 어조로 반론을 펼쳤다. 

"유럽의 군주들은 서로 싸우느라 날을 지새우고 있으니 원군을 보내올 턱이 없습니다.....(중략)..... 여기까지 온 이상 철수 따위는 논외 문제입니다. 오직 공격, 공격뿐입니다."

기세등등한 자가노스 파샤의 연설에 젊은 무장들이 연달아 일어나 찬성의 뜻을 밣혔다. 끝으로 메메드 2세가 사흘뒤에 총공격을 한다고 밣혔을 때 반대를 표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이는 혼란스러운 군주정의 시대에서는 나라를  사랑보다는 두려움으로 다스려야 나라를 통합할 수 있고,  우정과 신의보다 교활함과 잔인함으로 처세해야 살아남을 수 있음을 증명한다. 

한니발의 뛰어난 업적 가운데 가장 칭송받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는 다양한 인종과 민족으로 이루어진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낯선 나라에서 전쟁을 벌였지만, 전세가 유리할 때나 불리할 때나 군 내부에서 분란이 일어나지 않았고, 상관에 대한 불복종도 전혀 없었습니다. 그것은 한니발이 비인간적일 정도로 잔혹했기 때문입니다. 

스키피오도 뛰어난 인물로 칭송을 받지만 그의 군대는 스페인에서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주요한 이유는 스키피오가 너무 관대하여 군대 기강을 흩트려놓았기 때문입니다. 그 때문에 파비우스 막시무스는 그가 로마 군대를 타락시킨 장본인이라고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스키피오는 원로원의 통제를 받으면서 생활했기 때문에 결함은 더 이상 드러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대중에게 명성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군주론> 17장 사랑받는 대상이 되는 것과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것에 대하여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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