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근대 이후의 세계
1. 재산권
1787년 미국의 독립선언문에서 생명, 자유, 그리고 행복의 추구에 대해서 설파하기 전에 1600년대 영국에서는 이미 개인의 권리와 재산권이 만개하고 있었다. 영국의 존 왕은 1214년 노르망디를 되찾기 위한 전투에서 프랑스에게 완패했다 그러나 존은 포기하지 않고 다시 군사활동을 하기 위한 자금을 구하기 위해 귀족들에게 압력을 가하며 재산을 몰수했다.
이전까지 필요한 절차를 모두 무시한 이 행동에 귀족들은 분노하였고 왕에 대하여 봉기했다. 반란군은 영국을 점령하고 러미니드에서 왕에게 오늘날 마그나 카르타(대헌장)로 불리는 것에 서명하게 함으로써 싸움을 끝냈다.
이때 서명한 마그나 카르타에는 영국인- 평민, 귀족, 군주 자신의 권리, 의무, 처벌을 관장하는 판례법의 토대를 마련했다.
이렇게 축적된 판례법 즉, 관습법 (입법기관에 의해 제정된 것이 아니고 일상생활에서 관행으로 행해지는 법) 은 당대 대부분의 나라에서 유행하던 시민법과는 달랐다. 이전까지의 시민법은 중앙집중화 되어 있는 반면에 관습법은 권력의 분립을 강조했다.
그 어떤 자유인도 체포되거나. 감옥에 구금되거나, 자유권을 박탈당하거나, 불법화되거나, 추방되거나, 어떤방식으로든 괴롭힘을 당할 수 없다.
-마그나 카르타 39장 중-
이는 큰 차이를 만든다. 시민법을 채택한 국가는 입법부만 장악하면 지배할 수 있지만 관습법을 채택한 국가는 정부의 주요 부서 세 곳을 모두 장악해야만 한다. 따라서 절대적인 지배자가 등장하기 매우 어렵다.
즉, 왕 위에 법이 선 것이었다. 왕이 없어짐으로서 더 이상 재산이 몰수당할 위험에서 벗어났다. 뿐만 아니라 왕의 중요한 세금을 징수하는 수단인 자유무역 제한도 풀렸다. 왕은 더 이상 전시를 제외하고 외국 상인과의 여행과 거래를 방해할 수 없게 되었다.
여기에 더해 에드워드 코크와 존로크의 활약이 마그나 카르타의 불씨를 귀족의 위협으로 부터 지켜나갔다.
코크는 입법부 행정부 사법부의 삼권분립의 토대를 마련하였으며 왕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판사로서 목숨을 걸고 의회의 권리를 사수했다. 길드의 독점도 법으로서 처벌하였으며 1668년 명에 혁명으로 사법권이 제대로 확립될 때까지 수호자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코크가 행동가로서 활약했다면 존 로크는 책략가로서 활동했다. 로크는 왕의 권한이 신으로 부터 나온다는 필머의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 저술한 통치론에서 재산의 보존이 주된 목적인 국가를 제시했다.
자연 상태에서는 이 상태를 지배하는 자연법이 존재하는데 이 법은 모든 사람을 구속한다. 그리고 곧 그 법인 이성은 조언을 구하는 모든 인류에게 인간은 평등하고 독립적인 존재이므로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의 생명, 건강, 자유 또는 소유물에 대해 위해를 가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친다.
『통치론』
로크는 관습법의 측면에서 개인의 재산권을 옹호하였으며 실패한 국가는 국민에 의해서 교체될 수 있다고 여겼다.
군주나 권력자가 사회계약에 의해 통치를 수탁한 상황에서 국민의 재산과 자유를
보전하지 못할 때는 저항하고 새로운 입법자를 만들 권리가 국민에게 있다
『통치론』
그는 왕의 살해위협을 피하기 위해 평생 자신이 통치론의 저자가 아니라고 부인하며 살았지만 끝내 자유 민주주의 토대를 마련했다.
2. 과학적 합리주의
과학적 합리주의의 시작은 놀랍게도 천문학에서 시작한다. 그 이유는 대부분 국가와 나라에서는 농사나 길 찾기에 깊게 관련된 천문학에 관심이 많았다. 그러나 별들의 움직임을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고 각 국가의 신화와 종교에 기반하여 만들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천문학은 종교와 깊게 결합하여 사제들의 특별한 지위를 보장하였으며 오랜기간 인류가 과학적 합리주의에 도달하는 길에 자애물로 작용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천동설(지구가 중심이며 그 주위로 태양과 별이 회전한다는 이론)을 주장하며 비교적 계산이 잘 작동하는 모델을 만들었다. 많은 자연철학자는 프톨레마이오스의 모델이 다른 모델보다 더 직관적으로 있다고 여겼다. 교회는 이 모델에 1000년간 신성한 권위를 부여했다. 그러나 1600년 경 프톨레마이오스 모델이 많은 관측결과와 상충되는 것을 본 자연철학자들은 모델에 회의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중 첫 타자인 코페르니쿠스는 천동설을 부정하고 지동설(태양이 중심이며 그 주위로 지구가 돈다는 이론) 모델을 제안하였다. 이는 교회에 작은 균열을 제공하게 되었다.
여기에 이어서 프렌시스 베이컨이 경험주의 (귀납적 추론을 통해 자연의 본성을 밝힐 수 있다 )객관적인 수단으로 자연을 관찰하는 행위의 중요성을 설파했다.
최고의 증거는 당연히 경험이다.
-프렌시스 베이컨-
베이컨의 혁명에 따라 자연철학자들은 종교적 사유의 세계에서 벗어나 경험을 하나의 관측수단으로 적극적으로 사용하였으며 티코 브라헤(천체 관측자료), 요하네스 케플러(타원형의 궤도), 갈릴레오 갈릴레이(천체망원경 발달), 뉴턴(중력의 발견), 에드먼드 헬리(일식 경로와 시간 예측) 등의 걸출한 과학자들을 탄생하게 만드는 성과를 내었다.
각 과학적 발견이 생길 때 마다 그 발견은 대중들을 전율케 하였으며 종교적 세계관에 커다란 균열을 내기 시작했고 그 뒤 거의 파괴하여 종교를 권력의 중심에서 변방으로 밀어내었다.
3. 자본시장
아이디어를 경제적 현실로 전환하려면 탄탄한 금융시스템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금융시스템에서 나오는 엄청난 양의 자본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왜 지금까지 자본시장이 발달하지 못했을까? 우선 모든 벤처사업은 돈을 사용하며 그것에는 이자율이 있다. 모든 사업가는 자신이 빌린 돈에 이자율을 쳐서 값아야 한다.
여기에는 돈에 대한 가장기본적인 법칙 공급과 수요의 균형이 필요하다. 많은 돈이 생겨야만 빌려줄 사람이 생긴다.
여기에 자본이 값싸고 공급이 많아지더라도 투자자와 기업을 연결하는 시장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러한 시장은 17세기 이전까지 존재하지 않았다. 대부분은 돈은 국가에서 나왔고 치명적인 이자율을 동반하여 많은 사람이 국가에서 돈을 빌리지 않았다. 그리스에서 어음을 발행하고 보험을 만들기도 했지만 여전히 비싼 이자율로 시장은 탄생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17세기에 네덜란드에서 근대적 투자은행업이 생겨났다. 사업의 리스크를 여러 명의 투자자에게 분산하는 시장이 등장했다. 이로 인해 이자율 위험이 감소한 투자자들의 투자욕구는 상승하였고 이는 다시 이자율을 낮추는 선순환으로 작용했다.(그러나 투자자를 보호하는 중앙은행과 규제기관이 없었기 때문에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다 대서양을 횡단하는 장거리무역의 리스크를 감소하기 위해 만들어진 영국의 동인도 회사와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는 최초의 주식시장이 되었다. 이들은 영구적으로 배당금을 지급하며 (22%의 배당금) 삼각무역로를 보완했다. 일반적으로 한 차례의 항해에 5파운드의 자본이 필요했고 그것이 100파운드씩 500주로 나뉘어 판매되었다. 1년뒤 항해에서 배가 돌아오면 그 수익금이 주주들에 분배되었다.
그 뒤 남해회사 사태가 발생한 이후 영국에서는 시장의 유동성을 확보하기 위해 입법절차를 거쳐 주식회사의 설립절차를 단순화하며 유한책임의 보호범위를 확대하며 법률과 무역과 상업활동을 지원했다. 그리고 대대로 내려져오던 곡물법을 폐지하였다. 뿐만 아니라 채무자를 구속하던 채무자법이 사라지면서 사업가들은 투옥의 리스크까지 피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19세기말까지 영국은 투자자본을 공급하는 지구상 최고의 원천이 될 수 있었다. 이런 제도의 덕책으로 당시 2위의 예금액을 보유하던 파리와 9배 가까운 차이를 벌리며 폭풍성장했다.
4.운송과 통신
생산을 위해서는 동력이 필요하다. 서기 1000년까지 이 동력의 원천은 대부분 인간의 근육이었다. 조금 시간이 지나 인간은 자신의 부족한 근력을 보충하기 위해 짐승을 이용한 동력을 발전시켰다. 기원전 150년 수차가 그리스 후기에 나타났다. 빠르게 흐르는 물로만 구동되는 이 장치는 곡식을 가는데 이용하였다. 그러다 기원전 100년 알렉산드리아의 헤론은 인류 최초의 엔진 헤론 엔진을 만들었다.
이는 증기기관의 시초로서 엔진이 가열되면 통풍구로 증기가 배출되며 회전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장치들은 단순한 장난감에 불과하여 실생활에 쓰이지 못했다. 그러다1654년에 진공에 대한 실험으로 과학자들은 진공으로 엄청난 동력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후 여러 시행착오를 거쳐 뉴커먼과 와트가 만든 엔진들이 실생활에 적용될 수 있었다. 보일러의 증기가 만들어내는 이 엔진은 1분에 12번의 주기로 구동하며 5.5마력의 동력을 만들어냈다. 여기서 최초로 인간은 자연기후와 상관없이 사용할 수 있는 동력기관을 얻게 되었다. 그 후 와트가 뉴커먼의 증기기관의 문제점 (반복적인 냉각의 필요)를 극복하고 1802년에 정상대기압의 10배인 145파운드의 압력에 작용하는 엔진에 특허를 냈다.
그 후 증기기관을 탑재한 증기선이 등장하게 되었고 범선과 증기선은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처음에 범선은 증기선을 압도하였으나 최초의 증기선 중 하나인 브리티시퀸은 500톤의 화물과 750톤의 석탄을 실었다. 그 뒤에 그레이트 이스턴 배는 값비싼 석탄을 괴물처럼 먹어치워 사업적 실패로 남는 등 우여곡절을 거쳤다. 그 뒤 고압선박과 스크루 추진기를 달자 증기가 마침내 실용적인 동력수단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해상 다음은 육로였다. 처음에 발명가들은 마차에 증기기관을 탑재하려 시도하였고 1801년 트레비식이 성공하게 되었다. 이 최초의 자동차는 10톤의 70명의 사람을 시속 8키로미터로 운반할 수 있었다. 그 뒤 광산의 펌프를 관리하던 조지 스티븐슨은 나폴레옹전쟁에 맞서 석탄의 공급이 필요해지자 석탄차량을 개조하여 철로와 기관차 로켓을 만들었다.
1830년 9월 15일에 멘체스터 리버풀 노선이 개통되면서 근대사에 혁명을 일으켰다. 인간은 '여행'이라는 개념을 만들었으며 일과 주 단위로 측정되던 것들은 시간단위로 계산 되었다. 뿐만 아니라 과거 부유층에게만 제한되었던 장거리 여행이 모든 사람에게 가능해졌다.
1791년 화가였던 모르스는 자신의 내면에 발명가의 측면을 깨닫고 자신과 같은 배를 탄 승객으로 부터 외르스테드 바늘이 문자를 전송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항해가 끝나고 그는 코드의 개념을 창안했으며 아무런 전문지식 없이 전송기를 만들기 시작했다. 결국 모르스는 중계기를 추가한 단일 전선 설계의 전송기를 만들었다.
40마일의 전신선을 설치한 모르스, 게일, 베일의 팀은 많은 이들의 의심에도 불구하고 휘그당 전당대회에서 새로운 시스템 시연에 성공하여 열광적인 지지를 받았다.
1858년에는 미국과 유럽을 잇는 대서양 횡단 케이블이 설치되었으나 대부분의 시스템은 연결되지 않거나 너무 느렸다. 엔지니어들은 더 무겁고 내구성이 뛰어난 케이블이 필요하다고 판단했고 그레이트 이스턴 선박을 이용하여 부설작업에 착수했다. 여러 차례의 실패 끝에 그레이스턴은 인도까지 케이블을 연장하는 데 성공했으며 다음에는 오스트렐리일리아에서 월드 와이드 웹에 추가되었다.
1840말에 이르러 국가의 크기가 거의 0으로 줄어들었으며 1871년에는 지구 자체가 라나로 연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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