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며
다르마가 있는 곳에 승리가 있다
-<마하바리타>-
힌두 경전 중 하나인 <바가바드기타>' 거룩한 신의 노래'에서는 왕위를 둔 두 가문의 전쟁의 연대기를 기록하고 있다.
그중에서 아르주나의 이야기는 인간의 근본적인 고민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아르주나는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전사였다. 그는 사람들, 독사들, 마귀들을 수없이 베어왔다. 그는 시 지어 죽음의 신 까지도 쓰러트렸다. 하지만 양 진영에 자기 친척들과 친구들이 모두 있음을 보자. 그만 회의에 빠지고 만다.
그는 자신의 마부인 크리슈나에게 이렇게 외친다.
저기 나의 피붙이들이 있다. 모두들 전투에 나서고 있다.
대체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내 피붙이들을, 어르신들을, 은인들을 베어야 하기 때문이다.
설령 온 세상을 다 준다고 해도 그들을 벨 수는 없다.
아르주나는 슬픔에 잠겨 활을 집어던지고 전차에 주저앉아 버린다.
그때 크리슈나는 그에게 잘못된 동정심을 버리라고 충고하며, 이 전투는 단순히 왕위를 노리는 싸움이 아니라
'주어진 운명(Dharma)에 따르기 위한 전투'임을 상기시킨다.
2. 동양과 서양의 용사
동양과 서양은 서로 이상적으로 여기는 용사의 형태가 다르다.
서양의 용사는 '용을 죽이는 자'로 성 조지처럼 빛나는 갑옷을 입고 악에 맞서는 이미지가 그려진다.
반면, 동양에서 묘사하는 용사는 '인내하는 용사'로서 호랑이를 잡기 위해 돼지가죽을 뒤집어쓰고 기다렸다가 호랑이가 점심을 먹으러 다가오면 활을 쏴서 쓰러트린다.
서양에서는 동양의 이러한 덕목을 비겁함과 기회주의로 여기지만 이는 대단한 착각이다.
동양과 서양은 서로의 진정한 적이 다르기 때문이다.
서양의 용사는 외적인 승리를 중시한다. (용을 죽인다, 검을 뽑는다, 괴물을 쓰러트린다) 반면 동양의 용사는 내적인 승리를 더 중요시한다.(참는다, 결단을 내린다, 조화를 맞춘다)
왜 이런 차이가 날까?
서양의 세계관은 '선악의 세계관'이다. 따라서 선한 축과 악한 축이 서로 대립하고 있고 선한 측이 악한 축을 모두 쓰러트리는 것을 좋게 여긴다.
그렇기에 서양에서는 내적인 특성을 긍정적 특성(지혜, 용기, 절제, 정의)과 부정적 특성(비겁, 만용, 파렵치, 낭비)으로 나누어서
긍정적 특성을 개발하고 부정적 특성을 억제하는데 노력을 기울인다.
하지만 동양의 세계는 '음양의 세계관'으로 절대적 선도 절대적 악도 없다.
동양인들은 선과 악이 하나의 진리의 두 가지 측면이라고 생각한다. 존재하는 세상의 모든 선과 악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여긴다.
그래서 동양에서는 인간에게 '부정적'이라거나 '긍정적'이라는 측면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자신의 진정한 모습 그 자체를 받아들인다.
그래서 옛부터 동양인들은 복수심이 생기면 그것을 부채질하여 동기부여의 수단으로 삼고 탐욕이 생기면 성공에 대한 열망으로 환원시키고 걱정은 치밀한 계획으로 바꾼다.
그렇기에 과거 동양인들에게는 기존의 규칙을 깨버리고 다시 세우는데 거리낌과 죄책감이 없다.
고대 힌두교인들은 이러한 개념을 산스크리트어로 '다르마(Dharma)'라고 불렀으며 힌두교인들은 이를 본래 인생과 세상이 모순 그 자체임을 깨닫는 신적인 지혜로 여겼다.
3. 후안흑심(厚顔黑心)
남에게서 자신의 의지를 숨길 때, 그것을 '두껍다'라고 하고
남들에게 자신의 의지를 강요할 때, 그것을 '시커멓다'라고 한다.
-리쭝우-
이 다르마의 개념을 저자인 친닝 추는 '후안흑심(厚顔黑心)'으로 재해석한다.
여기서 후안(厚顔)이란 얼굴을 두껍게 하여 자신의 일을 이루는 것으로 자격지심을 떨쳐내고 세상이 우리에게 건 제약을 거부하는 뻔뻔함을 이야기한다. 이런 뻔뻔한 자기 확신에 찬 행동이 남들을 감화시키고 진심으로 믿게 만든다.
흑심(黑心)은 남에게 미치는 영향에 구애받지 않는 단호한 결단력을 말한다. 이는 마치 의사가 환자의 고통을 이해하면서도 의도적으로 무시하여 재빠르게 집도하는 용기를 의미한다.
후안흑심의 실천자는 세상에 옳고 그름을 구하지 않는다. 도덕과 선악에 붙잡히지 않고 세상에서 일관성을 찾지도 않는다. 오히려 이들은 비일관성이 현실의 중요한 구성요소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요소는 신적인 요소와 닮아있다. 신은 일관성이 없다. 우기에 가뭄이 들고 건기에 홍수가 난다. 바로 그 비일관성의 힘 때문에, 우리는 그를 '달래려고' 계속 기도하지 않는가?
친닝 추는 이러한 후안흑심의 자질로 세 가지를 꼽았다. 바로 기회를 기다리는 인내, 용기로운 속임수, 그리고 정의로운 살인본능이다.
4. 후안흑심의 세 가지 자질
1.기회를 기다리는 인내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시편 30편 5절-
큰 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남들의 비웃음과 모멸을 낮 두꺼움으로 방어하고 참아야 한다. 현대인들은 시간으로 승자와 패자를 판단한다. 정해진 시간 내에 얼마만큼의 성과를 내느냐가 기준이다. 그러나 진정한 승자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
다음은 한 남자의 인생 이야기이다.
그는 21세 때 사업이 망했다. 22세 때는 시의원 선거에 떨어졌고, 24세에는 또 사업이 망했으며 26세 때는 연인이 죽었고, 27세 때는 신경쇠약에 걸렸다. 34세 때는 하원의원 선거에서 떨어졌고 2년 뒤에 또 떨어졌으며 45세 때는 상원의원 선거에서 떨어졌다. 2년 뒤에는 부통령이 되려는 소망이 좌절되었고 49세 때 다시 도전했지만 또 떨어졌다. 마지막으로 52세가 되었을 때, 그는 대통령이 되었다.
누구인지 알겠는가?
그는 미국의 16대 대통령이자 현재까지도 역사상 가장 위대한 대통령으로 평가받는 에이브러햄 링컨이었다.
링컨은 거듭되는 실패 속에서 친구들이 자신을 피하는 지경까지 갔다. 이 세상의 기준에서 그는 확실한 패배자였다.
몇몇 친구들은 그가 자살할까 봐 두려워 총과 끈으로 된 물건을 숨기기까지 했다.
이처럼 진정 위대한 사람은 목표를 달성하는 길고 긴 시간 속에서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견디고 참을 수 없는 것을 참는 사람이다. 좋은 시절에는 누구나 잘 나갈 수 있다. 그러나 진짜는 이러한 고난의 시기에서 살아남음으로 증명된다.
후흑의 실천자는 무한한 인내로 위기를 견뎌내고 마침내 기회를 붙잡는다.
2.용기로운 속임수
이 세상에서 성공하려면 바보처럼 보이고, 실제로는 현명해야 한다.
-몽테스키 외-
포식자를 기만하는 것은 자연의 세계에서 필수적인 생존법이며 전쟁의 본질이다. 인생을 살아가는 일은 전쟁이며 성공적인 전투는 암암리에 계획을 짜고 야음을 틈타 기습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속임수를 비겁함의 표현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옛적부터 속임수를 쓰는 것은 용기의 일부로 여겨졌다.
일례로 서양에서 용기를 나타내는 가장 유명한 사람은 바로 '다윗'이다.
내용은 이렇다.
다윗은 한낱 양치기였다. 그는 형제들에게 도시락을 전해주러 가다가 블래셋의 거인 장군 '골리앗'을 보게 되었다. 골리앗은 이스라엘과 그 신을 모욕했다.
그러나 골리앗이 두려워서 아무도 나가지 못했다. 그러나 오직 다윗만이 골리앗을 쓰러트리려고 했다.
이스라엘의 사울 왕은 다윗이 산 채로 찢길 것이라 여기며 반대했지만 그의 눈빛 속에서 결연한 의지를 보았다.
사울 왕은 크게 감동하여 자신의 무구를 주었지만 다윗에게는 너무 크고 무거웠다.
다윗은 "저에게는 너무 무겁습니다."
라고 말하며 거부하고 겨우 양을 치는 도구와 돌멩이 몇 개로 골리앗과 맞서 싸웠고 이겼다.
여기까지가 모두가 알고 있는 다윗의 이야기이다.
그런데 여기서 생각보다 알려지지 않는 뒷 이야기가 있다.
그리고 이 뒷이야기가 다윗이 진정한 용기의 상징으로 거듭나게 해 준다.
골리앗을 쓰러트린 후 백성들은 왕인 사울보다 다윗을 더 좋아하게 되었고 이에 왕의 자리가 빼앗길까봐 두려움을 느낀 사울은 다윗을 죽이려고 추격자를 보낸다. 사울왕이 자신을 죽이려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다윗은 그대로 도망쳐 가드(블래 셋의 북동쪽)의 아기스왕의 영역으로 갔다.
그러나 불행히도 몰래 숨어서 살던 다윗을 몇 명의 아기스왕의 신하가 알아보았고 신하들은 왕에게 전했다.
"이 사람은 이스라엘 땅의 다윗인데, 그 땅의 사람이 노래하기를 사울이 죽인 자는 천명이고 다윗이 죽인 자는 만 명이라고 합니다."
이때 자신이 살해당할 것을 직감한 다윗은 잡혀오는 도중에 수염 사이로 침을 흘리며 문 앞에서 미적거리며 미친사람의 흉내를 냈다 이에 아기스는 분노하여 신하들을 다그치며
"너희가 미친 사람이 부족하여 이 자를 데려왔구나! 당장 쫓아내라!" 며 호통쳤다.
그래서 다윗은 무사히 도망칠 수 있었다.
다윗은 왜 미친척을 했을까? 거인을 쓰러트린 다윗이 전쟁터에서의 용기를 잃어버려서 이렇게 행동한 것일까?
아니다.
다윗은 자신의 내면을 극복한 진정한 용기로운 자였다. 그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하늘로 치솟던 자신의 명성을 땅에 떨어트리며 누군가에게 놀림과 비난받는 것은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이러한 다윗의 일화는 우리에게 용기의 두 가지 측면을 보여준다. 용기는 단순히 바깥의 적을 쓰러트리는데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자존심을 내려놓는 자기극복을 뜻한다는 사실을
3.정의로운 살인본능
나는 잔인해지리라, 친절하기 위해서
-셰익스피어의 <햄릿>中-
일을 정확하고 빠르게 마무리 짓는 행위는 '살인 본능'에서 비롯된다. 원주민들은 동물을 죽일 때 손바닥만 한 단검으로 빠르고 확실하게 경동맥을 찔러서 즉사시킨다. 이는 동물들이 불필요한 고통을 받지 않게 하는 일종의 배려이다.
인간종은 모두 수렵채집민에서 비롯되었고 그 유전자는 우리에게 계승되었다. 현대에 일을 잘하는 사람의 표현이 "빠르고, 확실하게"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비록 우리에게 외부적인 변화가 있었지만 그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우리나라의 역사를 살펴보자 고려국 말기 1388년 태조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해서 고려의 실권을 장악하자 신하들은 크게 두 편으로 갈라지게 된다.
고려를 없애고 조선을 만들자는 급진파와 고려를 없애지 말고 다음 왕에게 잇게 하자는 온건파였다. 이때 훗날 조선의 2대 왕이 되는 이성계는 급진파에 서 있었다. 그는 대숙청을 하기 전에 정몽주와 같은 인재가 아까워 그를 설득하기 위해 초대한 뒤 <하여가>라는 시를 지어 보여주며 자기편으로 만드려고 하였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힌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서 백 년까지 누리리라
-<하여가>-
이러나저러나 과거나 미래에 개의치 말고 함께 잘해보자는 뜻이 담겨있었다. 그러나 정몽주는 붓을 들더니 일필휘지로 시를 써서 대답했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수 있으랴
-<단심가>-
정몽주는 <단심가>로 자신이 죽어서 뼛가루가 되더라도 기존 왕조에 대한 마음을 버리지 않기로 표현했다.
결국 정몽주는 이방원이 선죽교에 매복시킨 군사에게 살해당한다. 여기서 정몽주에게는 아무런 죄가 없다. 그는 유능하면서도 청렴하기로 이름이 드높은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이방원에게 살해당했다.
하지만 과연 이런 일이 무조건 악하다고 비난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해 어떤 역사가들이 주장했듯 만약 이때 이방원이 정몽주와 자신의 형제들을 죽이지 않았다면 조선 최고의 임금인 세종이 내란을 진압하는데 많은 힘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우리가 쓰는 한글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이처럼 때로는 비록 아무리 좋은 것 이더라도 방해가 되는 것은 냉정하고 과감히 제거하는 '살인본능'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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