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들어가며
시시포스는 신들을 기만한 죄로 산 정상으로 바위를 밀어 올리는 형벌을 받는다.
그러나 이 바위가 정상에 도달할 때 쯤 바위는 다시 반대쪽으로 굴러 떨어진다. 시시포스는 이 무의미한 행위를 영원히 반복한다.
시시포스의 삶은 인간에 대한 은유다. 인간은 태어나고 살아가고 죽고 잊히는 과정을 역사 속에서 무한히 반복해 나간다. 인간이 가진 어떤 가치도 영원한 것이 없고 물질적인 것들도 영원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왜 열심히 살아야 하는가? 인간이 하는 모든 행위가 결국 무가치하게 변함에도 불구하고 왜 인간은 살아가야 하는가? 아니 애초에 인간이 이 땅 위에서 살아가는 것에 어떠한 의미가 있을까?
1.왜 자살하지 않는가?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자살이다.
-알베르 카뮈-
인생이 살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하는 것이야 말로 철학의 근본문제에 답하는 것이다.
자살과 같은 행위는 마치 어떤 위대한 작품과 마찬가지로 마음의 침묵 속에서 준비된다. 당사자 자신은 그것을 알지 못한다.
어느 날 밤, 그가 문즉 방아쇠를 당기거나 물속으로 몸을 던진다.
인간이 깊이 반성한 끝에 자살하는 일은 드물다. 거의 언제나 이성적으로 통제할 수 없는 일이 그 무엇이 위기의 발단이 된다.
자살은 하나의 고백이다.
그것은 삶을 감당할 길이 없음을 혹은 삶을 이해할 수 없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서 얼굴을 씻고 옷을 입는다. 출근버스에 타서 피곤한 몸을 이끌고는 회사에 들어간다. 늘 보는 상사 늘 보는 동료들 늘 반복되는 업무, 그리고 일이 끝나서 집에 돌아가서 다시 씻고 잠에 빠져든다. 그리고 다음날도 같은 일이 반복된다.
이렇게 지긋지긋하게 반복되는 삶 속에서 문득 "왜?"라는 질문이 당신을 사로잡는다.
그 질문은 당신의 주위를 둘러보게 한다. 당신과 똑같은 상황에 처한 이들이 당신과 같은 행동을 하고 있는 상황을 처음으로 보게 된다.
당신의 질문은 피폐함 속에서 활력을 얻어 더욱 생동감있게 바뀌어 간다.
"왜? 나는 여기에 있는 거지?"
"나는 왜 살아가는걸까?"
"내가 살아가는 이 삶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만약에.... 이 삶이 아무것도 아니라면, 그러면....."
이 권태로움이 죽어있던 의식을 일깨운다. 당신의 세상이 곧 낯설게 보인다.
이렇게 부조리를 인식한다.
이 신화가 비극적인 것은 주인공의 의식이 깨어있기 때문이다.
-알베르 카뮈-
과학은 우리에게 말한다. 이 세상은 원자로 이루어져 있고 전자로 환원된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그러나 그 사실이 당신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가?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과학은 말한다. 아무것도, 아무것도 당신은 아무것도 아니고 마찬가지로 당신의 삶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이야기한다.
안타깝게도 하나의 진리, 혹은 믿음을 가진 사람이 그 믿음에 구속되듯이 부조리를 한번 본 인간은 영원히 그것에 메인다.
부조리를 인식한 당신에게 놓인 선택지는 이것이다.
죽을 것인가? 정신적비약을 통해 문제를 모면할 것인가? 아니면 제 분수에 맞는 관념과 형상의 집을 지을 것인가?
역사 속에서는 온갖 종교, 온갖 예언자가 가득하다. 심지어는 신 없는 종교나 신 없는 예언자도 있다. 그리하여 부조리의 인간에게 비약할 것을 요구한다. 자신을 따르라고, 그렇지 않으면 영원한 생명을 잃는 다고 당신에게 경고한다.
그러나 부조리에 처한 인간은 자신이 '무죄'라고 느낀다.
2.반항
자신의 무죄를 느낀 인간은 반항을 시작한다.
이 반항은 동경이 아니다. 이길 수 있다는 실낱같은 희망조차도 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체념하는 태도를 거부한다. 놀랍게도 이 반항은 그 자체로 삶에 가치를 부여하기 시작한다. 반항은 삶의 위대함을 회복하기 시작한다.
그는 더 이상 이전처럼 회피의 도덕(종교, 사상, 이론들)과 손잡고서는 이 부조리의 짐을 덜어달라고 부탁하지 않는다.
자신의 어께에 짓눌리는 바위를 피하려고 하지 않고 오히려 기꺼이 짊어지고 옮기려고 한다.
비록 그것이 결국 다시 아랫세계로 돌아가는 무의미한 짓임에도 불구함에도 피하지 않는다.
자신에게 닥쳐오는 부조리와 정면대결을 결심한 인간은 놀랍게도 그 무엇보다 자유로워진다.
생각해 보라 부조리를 만나기 전까지의 인간은 어떠했는가?
미래의 나(자기의 운수, 정년퇴직 후의 자식들)에 관심을 가지거나 정당화(이 세상은 무엇 무엇이다, 자신의 삶에 어떤 의미가 있다.)에 목숨을 걸고 살아왔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부조리를 알고 난 후 이것들은 모두 산산조각 나 부서지면서 자신이 쇠사슬에 묶여 있음을 깨닫는다.
자신이 환상을 먹고 살아왔음을 불현듯 깨닫는다. 지금껏 인간의 정신이 구속되어 왔음을 나는 노예였음을 알게되는 것이다.
마침내 우리의 부조리에 대한 성찰은 고통스럽게 의식하는데서 출발하여 그 여정의 종점에 이르면 인간적 반항이라는 열정에 차 불꽃으로 되돌아오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부조리에서 세 가지 귀결을 이끌어낸다.
그것은 바로 나의 반항, 나의 자유, 그리고 나의 열정이다.
그래서 나는 자살을 거부한다.
반항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고귀한 행위이다. 거짓된 영원에 대한 향수에 빠져서 사는 것보다 자신의 용기와 이성을 택하는 행위이다.
3.마치며
시시포스는 아무것도 성취할 수 없는 일에 전 존재를 바쳐야 하는 형벌을 받은 사람이다.
하늘 없는 공간과 깊이 없는 시간으로나 측량할 수 있을 기나긴 노력 끝에 목표는 달성된다.
그때, 돌을 정상으로 올린 그 순간에 시지프는 돌이 순식간에 저 아래 세계로 둘러 떨어지는 것을 바라본다. 그는 아래로부터 정상을 향해 이제 다시 돌을 밀어 올려야 하는 것이다.
시시포스는 돌을 다시 올리는 일이 아무 의미가 없음을 알고 있다. 그가 의식적으로 자신의 행복했던 시절, 돌을 올려야 하는 의무가 그 고통이 없던 시절을 떠올리는 순간마다 바위는 더 무겁게 느껴진다.
바위를 벗어나고 싶어 할수록 자신의 비참한 모습에 속은 썩어 문 들어진다.
그러나 바위에서, 자신을 괴롭히는 이 바위에서 또 다른 무언가를 발견한다.
역설적으로 바위가 시지프의 귀에 이렇게 말한다. 아직도 모든 것이 끝나지 않았음을, 그렇기에 내 힘이 바위를 들어 올릴 만큼 남았음을...
시지프의 소리 없는 기쁨이 여기에 있다.
이 산의 정상을 향한 투쟁 그 자체가 인간의 마음을 가득 채우기에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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