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들어가며
이 책은 사회가 개인에게 합법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권력의 본질과 한계를 정한 책이다.
자유와 권력의 갈등은 인류사에서 오랫동안 반복되어온 갈등이다. 과거에는 특정권력자를 내세워 공동체 무리를 통솔하고 외적을 물리칠 필요가 있었다.
과거의 사람들은 이런 권력자에게 날개와 발톱을 달아주는 것과 동시에 제한하기 위해서 권력자가 지배할 수 없는 영역을 정하거나 공동체의 동의가 있어야만 권력을 사용할 수 있도록 헌법규정을 정했다.
그런데 현대에 민주주의 공화국이 등장하면서 이제 '권력자'가 아닌 '사회' 그 자체의 권력남용을 막을 수단이 필요해졌다.
실제로 민주주의 공화국의 권력은 여러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다.
- 권력을 행사하는 국민과 대상으로 행사당하는 국민이 늘 동일하지 않다. (국회위원과 회사원)
- 자치는 자신을 지배한다는 말이지만 실제로 행사될 때 자기를 제외한 나머지 모두에게 지배당할 수 있다. (자기 재산을 빼앗는데 당신 빼고 전부동의하는 경우)
- 국민의 의지라고 불리는 것도 가장 수가 많은 집단의 의지에 불과하다.(다수결이라면 악법도 통과되는 경우)
이런 민주주의 공화정이 가지고 있는 문제들은 과거 권력자가 폭정을 일삼던 때 보다 위험한 면이 있다.
이제 현대는 권력자처럼 형벌을 사용하지 않지만 이제는 잘못된 권력이 사용되어도 이미 일상 속에 녹아들기 때문에 거기에서 벗어날 생각자체를 못한다.
따라서 사회적 폭정을 유발하는 요소인 여론과 정서의 폭정도 막아야 한다. 잘못된 여론과 정서는 잘못된 사회를 조성하고 잘못된 인격을 가진 잘못된 인간을 배양한다.
이 책의 목적은 인간의 도덕적 이익이라는 이유로 다른 사람의 자유에 개입해서는 안되고 오직 개입이 허용되는 것은 자기 보호를 목적으로 할 때뿐이라는 것을 세상에 천명하는 데 있다.
-존 스튜어트 밀-
존 스튜어트 밀이 말하는 자유가 보장되는 영역은 크게 3가지로 나뉜다.
- "의식"이라는 내면적인 영역
- 취향과 추구의 자유
- 결사의 자유
이런 자유가 보장되지 않는 사회는 그 통치형태와 상관없이 자유로운 사회가 아니다.
1.토론에 자유가 달렸다.
민주주의국가를 유지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지식이 아니다.
바로 진솔한 토론이다. 앞에서 열거한 민주주의의 문제점을 타파할 수 있고 예방할 수 있는 방법으로 토론이 최선이자 최후의 방법이다. 미국의 대학교에서 토론하는 시간이 단순학습을 하는 시간보다 중요한 이유는 경제적으로 풍족하고 시간이 남아돌아서가 아니라 토론이 없이는 미국이라는 국가를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과거 권력이 '권력자'에게서 '사회'로 넘어오면서 민주주의의 문제점을 인지한 초기 미국인들은 예방을 하면서도 민주주의 잠재력을 최대한으로 끌어내는 방법을 고안했고 그것이 바로 토론이었다.
오늘날의 많은 국가들은 민주주의적인 체제를 단지 좋아 보이기에 채택한 경향이 있다. 이런 국가들의 특징은 겉모습만 민주주의를 가져온 경우이다. 그들은 미국의 핵심적인 경쟁력인 토론을 장려하지 않는다.
아니,할 수 없다.
토론을 장려하면 유지되어 왔던 관습이 파괴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관료주의가 깊게 물든 국가에서 권력을 가진 사람에게 토론을 통해 솔직한 의견을 제시하면 자신의 직장뿐만 아니라 목숨까지 위태로워진다.
우리의 그러한 예상과는 반대로, 그들은 정체되어 있다. 수천 년 동안이나 제자리에 머물러 있다. 그들은 스스로 진보해 나갈 동력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진보해나가고자 한다면 외국인의 힘을 빌리지 않으면 안 된다.
-165p 중국의 경우
개성을 무시하는 관습과 전통의 독재가 너무도 오랫동안 지속되어버려 겉모습만 민주주의의 맛있는 부분만 가져온 국가들은 스스로 새롭고 독창적인 아이디어를 스스로 생산해내지 못하고 외국으로부터 독창성을 구걸해야만 겨우겨우 앞으로 나갈 수 있다.
따라서 민주주의의 잠재력을 제대로 발휘하기 위해서는 각 사회에서는 토론의 자유와 다양성을 존중해야 한다.
2. 사상과 토론의 자유
1. 견해
일반적으로 사람들의 견해는 각 개개인의 선호에 의해서 결정된다. 그리고 각자가 견해라고 부르는 것들도 이성적 근거가 밑바탕이 되지 않은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하니까..."인 다른 사람의 선호가 근거가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러한 선호를 이루는 많은 요인 중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요인은 "나에게 어떤 이익이 있을까?"이다.
세상에는 이성적으로 근거를 따지기보다 시류에 편승하는 사람들이 더 많고 그런 사람들이 인간사회를 만들어 낸다.
따라서 우리가 도덕률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대부분 이해관계와 우월의식에서 빚어진 작품이다.
스파르타인과 노예, 농장주와 흑인 노예, 군주들과 신민들, 귀족과 평민, 남자들과 여자 등등의 계급제도들은 각 시대와 상황에 따라 존재해 왔다.
이런 지배계급이 약해지고 이해관계가 불안정해지면 새로운 지배계급이 등장하여 기존의 세력을 무너뜨린 것이 인간의 역사이다.
여기서 당연히 의문점이 생긴다.
어째서 인간은 점점 발전해 나갈까?
인간의 삶에서 생각이나 통상적인 행위의 역사를 생각해 볼 때 세월이 흐르면서 그런 것들이 점점 더 나빠지지 않은 이유는 인간이 선천적으로 똑똑해서가 아니다. 왜냐하면 현대에서도 그 자체로 옳고 그름이 분명하지 않은 문제에서 100명 중에서 99명은 제대로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완전히 결여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류에게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전반적으로 우세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바로 인간 지성의 한 특질 덕분이다.
지성적 도덕적 존재로서의 인간에게 존재하는 모든 훌륭한 것들을 만들어낸 원천이라고 할 수 있는 이것은 다름 아닌
"자신의 잘못을 고쳐나가는 특질"이다.
2. 토론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들
앞서 이야기하다시피 인간의 판단이 지니는 모든 힘과 가치는 그 판단이 틀렸을 때 바로잡을 수 있다는 데 달려있다.
그런데 인간이 자신의 잘못을 수정하고 진보하기 위해서는 그 판단을 바로잡을 수 있는 수단이 언제나 마련되어 있고 그것을 적극적으로 추구할 때 가능해질 수 있다.
그리고 그 진보의 핵심은 '토론'이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 와서도 토론은 형식적으로만 유지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비판을 수용하지 못하는 인간의 천성적인 특성 때문에 토론은 크게 효과를 보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토론을 피하고 싶어 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안타까운 말이었지만 역사적으로 지금껏 온갖 의견을 가진 사람들의 의견을 들어보고 연구하는 방법 이외에 다른 방법으로 지혜를 얻은 현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자신의 의견에 대한 비판을 받아들이고 조금이라도 차단하지 않는 사람의 판단은 그런 과정을 거치지 않는 사람의 판단보다 더 나을 수밖에 없다는 것은 모두가 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하더라도 자신과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을 받아들이기는 힘들다.
소크라테스와 예수의 시대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들은 당대 최고의 성인으로 추앙받았을 뿐만 아니라 이후 모든 성현들의 우두머리이자 원형이었다. 심지어 이들은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보다 더 나쁜 사람들이 아니었고 도리어 종교적이고 도덕적이며 애국적인 감정에서 자신의 시대의 최고의 수준이거나 또는 그 이상의 수준에 도달해 있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당대의 지성인들에게 "청년들을 타락시키고 신을 모독했다."는 단죄를 받아 독약을 마셨고 제사장들에 의해 예수는 골고다언덕에서 십자가에 매달렸다. 당시의 제사장은 예수의 말을 듣고 분노하여 옷을 찢었다고 하는데 이는 당대의 상식과 전통에 즉 '상식' 맞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가장 '상식적'이라고 스스로 자부하는 현대인들이 앞으로 등장할 선지자를 죽이지 않으리란 보장이 어디에 있는가?
3.'아니요'를 말하지 못하는 사회
사람들은 진리는 언제나 온갖 박해를 극복하고 결국 승리한다는 말은 이 사람 저 사람의 입을 거쳐 이제는 상식처럼 되어버렸지만 사실은 인류의 모든 경험에 의하여 틀렸음이 증명된 기분 좋은 거짓말들 중 하나일 뿐이다.
실제로 루터 이전의 종교개혁이 20번은 더 있었지만 모두 진압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리는 자연스럽게 드러난다고 믿는 사람이거나 현 상황을 유지만 하려는 것에 대단히 만족스러워하는 사람은 그런 평화를 위해 반드시 지불해야 하는 치명적인 대가를 간과하고 있다.
바로 "인간 지성의 도덕적인 용기 전체"이다.
토론이 보장되고 추구되지 않는 사회에서는 뛰어난 지성을 지닌 사람들이 그 진리를 가슴속에만 간직할 채로 대중들에게 말할 때는 자신이 지금 하는 말들이 잘못된 것임을 알면서도 마치 자신의 결론인 것처럼 말해야 하며
이 세상에는 대중이 듣고 싶어 하는 것만 들려주는 모리배들이 넘쳐나게 된다.
그 결과 인류가 가장 심오한 주제들에 대해 과감하게 사고하는 것은 불가능해진다. 이런 사상의 자유가 없는 곳에서는 위대한 사상가가 나올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조차도 지성을 가능한 한 최고로 발전시키지도 못한다.
이런 사회의 학습은 토론 없이 교사나 책을 통해서 자신의 모든 지식을 얻는 경우밖에 없는데, 온갖 지식을 닥치는 대로 주입식으로 암기해서 머릿속에 집어넣는 것으로 만족하는 얼간이가 될 뿐만 아니라 찬반 양쪽의 의견들을 모두 들어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끼지 못하는 균형감각을 상실한 인간이 된다.
또한 이렇게 교육받은 사람들은 자신이 배운 지식이 절대적으로 틀리지 않았다고 믿음을 가지고 있으므로 이론이나 실전 속에 있는 오류를 지적하는 것을 보면 눈살을 찌푸리고 못마땅하게 여긴다.
이들은 성인이 되어서는 잘못된 의견을 가진 사람들, 속히 '이단'이라 불리는 사람들의 입에 제갈을 물리고자 한다.
자신들의 노력이 잘못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러나 온 인류가 한 사람을 제외하고 모두가 동일한 의견을 갖고 있고, 오직 한 사람만이 반대 의견을 갖고 있다고 해서 강제력을 동원하여 한 사람을 침묵시키는 것은 권력을 장악한 한 사람이 강제력을 동원해서 인류 전체를 침묵시키는 것만큼 도덕적으로 정당하지 못한 행위이다.
뿐만 아니라 이것은 인류사전체, 현재 세대들 뿐만 아닌 미래세대들과 그 의견을 찬성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반대하는 사람들에게도 크나큰 해악이다. 만약 그 견해가 옳은 경우에는 오류를 진리로 대체할 기회를 빼앗기고 그 견해가 틀린 경우에는 그 견해와의 충돌을 통해 진리가 더욱 분명하고 생생하게 드러날 기회를 빼앗기기 때문이다.
이렇듯 자유로운 토론이 없는 사회에서 사는 사람이 말하는 진리란 사람들은 속에서 생생한 실체를 만들어내어 살아있는 신념이 되지 못하는 그야말로 '죽은 신념'이 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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