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자의 조건>
글쓴이: 이주희
출판사: EBS MID
0.들어가며
체스게임의 기본규칙 중 하나는 죽은 말은 다시 살아날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만약 친구와 당신이 내기를 해서 내가 딴 친구의 말을 내가 다시 쓸 수 있게 된다면,
그러나, 친구는 내 말을 따도 사용할수 없다면 그 친구는 아마 당신과 체스게임을 하지 않을 것이다.
당연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체스판은 내 말들이 꽉 채우고 있을 것이기 때문에...
친구는 당신에게 불평불만하며 말할것이다.
"이건 불공평해 내가 딴 말은 사용할 수 없고 니가 말을 따면 내 말을 사용할 수 있다니?"
체스게임에서는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없겠지만 현실에서는 어떨까? 현실에서는 오히려 위의 상황이 보편적이다.
날마다 강자는 더욱 강해지고 약자는 약해진다. 부, 군대, 기술력, 지식, 문화는 가진 자에게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성질이 있다.
심지어 하늘의 별들조차 질량이 클수록 중력이 강하지 않던가?
신약성서의 마태복음이 이러한 사실을 잘 나타내는 문구를 가지고 있다.
"가진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있는 것 마저 빼앗기리라."
-마태13:12-
그러나 우리는 역사에서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을 관찰할 수 있다.
정말 위의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어째서 강자였던 국가나 인간은, 약자라고 불리던 국가나 인간에게 자리를 뺏기고 멸망하는가? 우리가 본 역사적인 역동은 왜 발생하는가?
어떻게 듣지도 보지도 못한 국가나 인물이 초신성처럼 등장할 수 있는가?
중국은 글을 쓰는 현재도 명실상부 강대국인 국가고 현재 중미 무역전쟁의 주역이기도 한 중국은 모든 면에서 많고 크다.
그렇다면 지금까지의 역사적 순리대로 중국은 미국을 넘어서야 하지 않겠는가?
어느 날 하버드 대학의 조지프 나이 교수는 싱가포르의 리콴유 전수상에게 질문을 던졌다.
"중국이 언제쯤 미국을 추월할 것 같습니까?
리콴유 수상은 중국계 화교 출신으로 그 질문에 대해서 이렇게 대답했다.
"중국은 미국을 추월할 수 없습니다."
그는 그 뒤에 덧붙여서 설명했다.
"중국의 인적자원은 13억이지만 미국의 인적자원은 70억이기 때문입니다. "
여기서 중국이나 미국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은 기이하게 여길 것이다. 미국의 인구는 기껏해야 3억 정도인데 왜 70억이라는 숫자가 나오는가?
이것에 대한 답이 바로 세계의 패권을 쥐고 강자가 되는 비밀열쇠인 셈이다.
1. 제국과 황제를 만든 힘
로마에서 최초로 자신의 얼굴을 새겨 넣어 화폐를 주조한 사람이 있다.
바로 우리가 잘 아는 황제의 기원이 되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이다. 기원전 45년 에서부터 44년에 종신 독재관으로 선출된 카이사르는 원로원으로부터 자신의 얼굴을 화폐에 세길 권리를 이어받았다.
더욱 흥미로운 사실은 같은 시대에 신격화할 수 있는 권리를 받았는데 (이는 현대의 신의 개념이 아니라 로마에서는 흔히 업적을 이룬 사람을 신격화하는 제도가 있었다.) 그때 카이사르는 '클레멘 티아 카이사 리스'로 신격화가 되게 되는데 그 의미는 '관용'이었다. 한마디로 카이사르는 '관용의 신'이 된 것이다.
당연히 로마의 화폐에는 카이사르의 얼굴과 관용의 문구가 적혔다.
사실, 카이사르에 대한 현대인들의 평가는 둘로 나뉘는 경향이 있다. 공화정을 무너뜨린 독재자라는 의견과 당대의 공화정은 정치적으로 부패했기 때문에 카이사르라는 자정작용이 불가피하다는 의견이었다.
이러한 평가가 어찌 됐건 카이사르의 일대기를 살펴보면 '그가 과연 관용의 황제였나?' 에는 반론의 여지가 없다.
그는 자국군인 로마군 내전을 벌일 때나 루비콘강을 건너서 싸울 때에도 적대하는 로마인을 죽이지 말라고 엄명했으며 당시에 야만인이라고 불리던 갈리아인에게도 로마 시민권과 원로원이 될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할 정도로 개방적인 인간이었다.
뿐만 아니라 훗날 자신을 죽일 브루투스에게 자신의 유산을 승계할 대상으로 지명해놓았을 정도였다.
그렇다. 지금부터 말하는 강자의 조건은 바로 관용이다.
카이사르가 출현하기 전 로마에서는 재앙과 같은 일이 벌어졌다.
성인 남자가 10분의 1이 살해당하고 원로원 위원 (현재의 국회위원과 비슷한 존재)의 3분의 1이 살해당하는 전투가 있었다.
칸나이 전투(BC.216.8.2)라고 불리는 이 전투는 페니키아인 명장인 한니발이 무역거점인 시칠리아를 둘러싸고 일으킨 전쟁에서 로마군을 궤멸시킨 희대의 사건이었다. 보통의 국가의 경우 이 정도로 타격을 입고도 다시 재기하는 국가는 전례를 찾아볼 수 없었다.
알프스 산맥을 넘는 엄청난 모험을 성공시킨 한니발은 갈리 아인을 포함하여 5만이 조금 안 되는 병력으로 로마군 75만 명과 싸워서 싸우는 족족 승리했다. 트레비아 전투, 트라시메노 전투, 칸나이 전투를 연승하면서 로마군의 장군들은 살해당하거나 포로로 잡혔다. 그런데 한니발의 전략은 이게 끝이 아니었다.
한니발은 희대의 명장답게 전혀 다른 생각을 품고 있었다. 바로 연전연승을 지속함으로써 로마의 동맹들이 로마를 배신하고 자신의 편에 붙게 만들려는 생각이었다.
그는 전쟁에서 승리할 때마다 로마군은 처리하고 로마 동맹군을 살려서 보내는 식으로 로마의 동맹군을 끊임없이 회유했다.
하지만, 한니발의 예상과는 달리 동맹국들은 로마를 배신하지 않았다.
로마가 끊임없이 패배하고 있는 와중에도
왜 동맹국들은 로마를 배신하지 않았을까?
바로 그들은 자신을 동맹국이 아닌 로마인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때 자신들도 로마에게 공격당해서 정복당한 자들이 왜 그렇게 생각하게 된 것일까?
바로 로마라는 국가의 기원을 안다면 이해할 수 있다.
로마의 기원은 부족에서 추방된 부랑자 집단과 사비니의 연맹국가였다. 사비니 여인의 약탈이라는 작품을 통해서 로마의 기원을 알 수 있는데 여자가 부족했던 부랑자 집단은 남자 사비니 인들을 술 취하게 하고 사비니 여인들은 약탈했다.
당연히 술에 취해 제정신이 아니었던 사비니 인들은 부랑자들에게 밀려났다.
그 후 수차례 부랑자 집단과 사비니인들 간의 간헐적인 전투가 벌어졌지만 부랑자들이 이겼다.
그러나 이 부랑자 집단은 지금껏 다른 부족들의 유서 깊은 관습 '남자는 모두 죽이고 여자는 뺏는다.'를 하지 않았다.
상대 부족을 몰살시키지 않고 통합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원 때문에 그들은 외국인들을 자신의 시민으로 대하는 것에 비교적 익숙할 수밖에 없었다.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순혈주의를 고집하여 인구가 점차 감소하다 멸망한 것과 달리 로마는 이민자들에게도 시민권과 고위공직에 공평하게 선출시켰기 때문이다.
따라서, 동맹국 국가의 시민 대부분은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고 자기 자신을 '로마 시민'으로 여겼으니 배신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한니발은 동맹국 국가들의 성문 앞에서 쫓겨날 수밖에 없었고 전쟁이 장기전으로 가면서 그의 맞수이자 로마의 걸출한 명장 스키피오의 탄생을 초래할 수 밖에 없었다.
2. 관용의 범위
만약 한 기독교인이 찬송가를 부르며 이슬람교 거주지역을 지나가는 일이 가능할까?
반대로 이슬람교도가 쿠란을 읽으며 기독교인들 사이를 지나가는 일이 가능할까?
현대에 와서는 불가능한 일이 되었지만 1240년 몽골제국이 있었을 당시에는 가능했다.
알렉산더 대왕 때보다 넓은 영토를 다스렸던 몽골제국은 제국의 자격을 시험받고 있었다.
뛰어난 장수들과 훌륭한 말, 그리고 독특한 제작방법으로 사거리와 관통력을 높인 위력적인 활, 마유주나 말고기를 이용한 효율적인 식량이 있었음에도 말이다.
바로 성이었다. 기병대 중심인 유목민은 성을 공략할
수 없었다. 설령 공격한다고 하더라도 전멸을 면치 못했다.
그러나, 칭기즈칸이 등장하고 이러한 문제는 금방 해결되었다. 뿐만 아니라 세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정도의 공성 기술력을 갖추게 되었기 때문이다.
몽골이 세계사에 등장한 지 불과 50년에 불과한데 어떻게 기술력으로 성을 가진 나라들을 굴복시킬 수 있을까?
당시 몽골의 전력은 주전력인 기병대와 장거리를 사격하는 강력한 활이었다. 그러나 기병대의 특징인 가벼운 무장으로는 빽빽하게 밀집되어있는 중기병의 대형을 돌파할 수 없었다.
그러나 몽골은 뜻밖에도 여진족, 키찹크 투르크족, 말갈족을 중기병으로 군대에 편입시켰다.
또한 북중국의 서하를 공격할 때 중국인 기술자를 기용해 공성병기를 제작하여 공격하는가 하면
1273년 남송의 양양성을 공격할 때는 페르시아의 기술자를 통해 회회포를 제작하여 공격하였다.
더욱 놀라운 점은 기술자들은 몽골에 강제로 끌려와서 일을 한 것이 아닌 자발적으로 찾아와서 기술을 선보였다는 점이다.
몽골민족은 기술자들을 후하게 대접하고 존중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칭기즈칸은 정복한 지역을 피정복자로 대우하지 않고 몽골제국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였다.
그렇다면 칭키스칸은 과연 이런 개방적인 생각과 관용을 어떻게 가지게 되었을까?
칭키스칸은 관용이 숨 쉬듯이 존재하는 전성기 로마와 비슷한 환경에서 자란 것인가? 아니다. 오히려 어린 미래의 칭키스 칸이 될 남자 테무친은 관용은커녕 제 목숨조차 건사하기 힘든 환경에서 자라왔다.
"너무 막막하다고,
그래서 포기해야겠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 목에 칼을 쓰고도 탈출했고
뺨에 화살을 맞고
죽었다 살아나기도 했다."
-칭기즈칸-
테무친은 9살에 친족에게 버림받고 부족이 약탈당했다. 타타르족과의 전쟁에서 패배했기 때문이다.
관용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잔혹한 몽골의 초원을 떠돌아다니며 방랑하는 것이 그의 유년시절의 전부였다.
먹을 수 있는 것이라고는 땅을 기어 다니는 들쥐들밖에 없었고 그마저도 잡기 힘들었다.
테무친이 자신의 뒷배이자 친족인 옹칸에게 속아서 절멸당할 위기에 처했을 때도 그의 곁에 남은 있는 19명은 서로 다른 부족 다른 종교의 출신이었다.
그들은 하나의 흙탕물에 입을 씻으며 형제가 되기로 맹세했다.
이처럼 테무친의 유일한 도움은 그의 친구들과 부하들밖에 없었다. 칭키스칸은 씨족과 혈족 중심의 사회에서 동료들의 충성심과 믿음을 더 신뢰하게 된 것이다.
그 후, 1235년 프랑스 왕은 몽골에 기욤 드 루브룩을 스파이로 파견했다.
그는 몽골의 자세한 정보와 당대 몽골의 칸인 뭉케 칸(몽골 4대 칸) 을 기독교인으로 만드는 것이었으며, 더 운이 좋으면 십자군 전쟁에 칸이 도움을 주리라는 달콤한 상상을 하고 있었다. 가능성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
뭉케칸의 어머니가 기독교인이었기 때문이다.
루브룩은 역참인 '잠'을 통해서 몽골제국에 도달했다. 수도 카라코룸에 도착했을 때 기욤 드 루브룩은 난생처음 보는 광경을 목격했다. 이슬람교, 기독교, 불교, 중국인들이 서로 공격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인들이 성당을 가는 동안 이슬람교의 예배당을 지나가면서 찬송가를 부르는 것이다.
이슬람교, 기독교, 불교와 각종 종교인들이 둘러앉아 종교에 대한 토론을 나누었다. 한 사람이 이야기를 하면 술을 한잔 마신 뒤 다음 사람이 이야기하는 방식이었다.
이러한 환경에서 기욤 드 루브룩은 결국 뭉케 칸을 개종시키려는 계획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3. 불관용의 최후
그렇다면 만약 뭉케 칸이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관용을 버렸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뭉케칸이 칼을 빼들어 기독교민 이외의 이민족, 이교도들을 전부 처형시켰다면?
역사에 이런 만약은 의미가 없지만 비슷한 사례를 가진 다른 국가를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스페인이다.
카를로스 1세의 아들인 펠리페 2세가 다스리던 때이다. 이때에 역사에 큰 변곡점을 남기는 사례가 두 가지 나타나는데
첫 번째는 영국이라는 나라가 초강대국으로 부상하고 두 번째는 대항해시대를 주도한 네덜란드라는 나라가 탄생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당시 바다에서 최강의 국가는 어디일까? 하면 누구나 스페인을 뽑을 것이다.
스페인은 가톨릭의 수호자를 자처하고 있었고 페리페 2세는 가톨릭의 수호를 신의 사명으로 여겼다.
따라서 가증스러운 개신교 국가인 영국을 스페인으로 통합시키고 개신교를 땅에서 몰아내고 싶어 했다.
"내 아들이 이교도라면 내가 아들을 화형 시킬 장작을 직접 잘라 나르겠소"
-펠리페 2세-
그러나 개신교를 극심하게 탄압한 나머지 자신의 영지였던 네덜란드의 개신교인들이 반란을 일으키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결코 강대국이라고 불릴 수 없었던 영국의 여왕 엘리자베스 1세에게 결혼을 거절당하자 이교도를 박멸한다는 명목으로 영국에게 전쟁을 선포했다.
바다의 패자 스페인은 '무적함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당시에는 여러 배의 종류가 있었지만 바람을 이용해 움직이는 범선과 인력의 힘을 이용해 다수의 노잡이를 태운 갤리선이 있었다.
당대의 상식으로는 범선은 크기가 크고 기동력이 떨어져서 전투에는 적합하지 않았지만 많은 화물을 실을 수 있기 때문에 상선으로 쓰였고 갤리선은 크기에 한계가 있지만 속도가 빠르고 회전이 자유롭게 된다는 점에서 전투선으로 쓰이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당시의 전투는 대포로 싸우는 게 아닌 베끼리 접근시켜 갈고리를 건 후 백병전으로 싸웠기 때문에 한 배에 얼마만큼의 전투원이 탑승해있는지가 승패를 갈랐다.
즉, 선박이라는 것은 육지의 연장선에 불과했다. 그러한 점에서 스페인은 가히 바다의 패자였고 무적이었다.
영국에게 전쟁을 선포한 후 무장한 스페인 병사들이 엄청난 수의 배에 탑승했고 그것을 본 사람들의 표현으로
'산맥이 움직이는 것 같았다.'라고 표현할 정도였다.
반면 영국군은 해상 병력이라고는 해적밖에 없었다. 사략선이라고 불리는 이 해적들은 국가공인 해적들이었고, 전쟁시에 영국에 고용되어 전투를 벌였다. 자체 해군이라고는 거의 없는 영국이 어떻게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이길 수 있었을까?
바로 주철 대포와 레이스 비트 갈레온 선이라는 신기술의 결합이었다.
대포를 만들기에 가장 적합한 소재는 바로 청동이다. 청동은 값이 굉장히 비싸지만 더 큰 포탄이 들어갔을뿐더러 녹는점이 낮아서 신축이 유연하여 발사한 후에 대포가 망가지는 일이 없었다.
반면에 주철 대포는 청동보다 녹는점이 두배 이상 높아서 한번 발사하고 나면 대포 자체가 폭발하거나 발사한 사람까지 죽게 되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러나 영국의 헨리 8세의 노력으로 주철 대포를 개량하는 노력을 거듭하여 마침내 싼값에 많고 비교적 안전한 대포를 생산하는 데 성공했다.
여기에 레이스 비트 갈레온 선이라는 희대의 선박은 범선을 개량하여 만든 갈레온 선에 한 번 더 개량을 거쳐 낮은 선두 부분으로 바람을 가르고 전체적으로 낮은 높이의 레이스 비트 갈레온 선이다. (쉽게 말해 중형차에서 람보르기니 같은 스포츠카처럼 차체가 낮아진다고 생각하면 쉽다.)
이 레이스 비트 갈레온 선은 무려 200문의 대포를 장착할 수 있었는데 비싼 청동 대포는 들어갈 수 없었지만 값싼 주철 대포는 얼마든지 들어갈 수 있었다.
이 기술들을 최대한 이용하여 영국의 '드레이크 선장'은 백병전을 최대한 지양하고 갈고리가 닿지 않는 범위에서 무적함대를 향해 주철 대포를 신나게 쏘아댔다. 1588년 9월 21일 결국 무적함대는 8척을 남기고 바닷속으로 가라앉게 되었고 영국은 '해가지지 않는 나라'의 발판을 마련한 것이다.
'그렇다면 펠리페 2세는 그런 주철대포 신기술을 몰랐다는 말인가?'
여기서 글을 읽는 분들 중에 이런 의문을 가지게 된다면 제대로 읽어왔다고 할 수 있겠다.
펠리페 2세는 알고 있었고 이용하려고 했다. 그러나 기술자들이 통 스페인 땅에 오려고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당시 펠리페 2세가 주도한 잔혹한 종교재판으로 인해서 자국의 기술자들과 인력들이 다른 나라로 망명하거나 타국의 기술자들도 오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4. 이야기를 마치며
중국은 왜 미국을 넘을 수 없을까? 패권국이 되기 위해서는 앞서 보았다시피 인력과 기술뿐만 아니라 그것을 다른나라에서 끌어올 수 있는 관용이 뒷받침 되어야 한다.
그러나 중국은 현 시점으로는 중화사상에 물들어 있고 또 그렇게 교육받기 때문에 그 잠재력을 다 발휘할 수 없다. 다른 나라의 기술과 문화를 받아들이는 관용을 발휘하기보다 적당히 중국중심의 사상과 타협하여 처음부터 타국의 문화가 자기 문화였다고 생각하는게 형편에 좋은것이다.
그래서 주변국들과의 관계가 좋을래야 좋을 수가 없다.
자기 문화나 기술을 훔치는 나라와 잘 지낼수야 있겠는가?
반면, 미국의 인적자산은 왜 70억이라고 이야기했을까? 바로 미국이 바로 오늘날의 강대국에 가장 가까운 나라이다.
미국은 자신의 나라의 롤 모델을 로마라고 여긴다. 미국은 여러 주들이 모여서 만들어진 연방국가이다.
그 역사는 전 세계의 나라들 중 손꼽힐 정도록 적지만 그 영향력은 크다.
비록 인구는 3억에 불과하지만 70억의 잠재력을 뿜어내는 것이다.
2012년 기준으로 IMF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국내 총생산은 15조 7천억 달러 세계 총생산의 22%에 육박한다.
미국은 이민자들을 가장 많이 받고 융화시키는 용광로의 역할을 하고 있다.
그렇다면 결국 세계의 패권을 쥐는 방법은 무엇인가? 바로 '관용'이다.
스페인처럼 당시에 엄청난 양의 금과 군사와 기술을 가지고 있더라도 관용을 잃는 순간 몰락하고
살아있는 쥐를 씹어먹던 소년을 세계를 다스리는 칸의 지위에 올려준 것도 관용의 힘이라고 할 수 있겠다.
처음에 논했던 체스를 기억하는가? 상대의 말을 딸 때마다 나의 말을 늘릴 수 있는 수단은 적어도 체스 판 위에서는 없다.
그러나, 세계라는 무대 속에서 관용을 지니는 개인과 국가가 될 수 있다면 결국 가능하게 될 것이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