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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길 <스토아적 삶의 권유>

by 안테암블로 2022. 9. 4.

글쓴이:마르코스 바르게스
출판사:레드스톤


0.들어가며

'삶의 질'은 대게 '생각의 질'에 달려있다.

우리가 자주 하는 생각이 우리의 선택을 만들고, 우리의 선택은 우리자신과 운명을 자아낸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현대의 사회는 자신의 생각을 바꾸는 법을 알려주지 않는다.

이때, 철학은 자신의 생각을 바꾸고 나아가 삶을 바꾸는데 더없이 좋은 지침이 된다.

하지만 생각이 삶의 질을 바꾼다는 나의 주장을 황당하게 여기는 사람들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행복이란 우리의 내면이 아닌 외부적인 요소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다.


그렇게 생각된다면 아래의 이야기를 한번 보자.

과거, 에픽테토스라는 노예가 있었다.
스토아 철학자인 그는 어떤 일이 일어나도 결코 당황하거나 놀라는 일이 없었다.
하루는 그의 태연하고 의연한 모습에 심술난 주인이 나쁜마음을 먹었다.
불쌍한 에픽테토스의 다리를 부러뜨려서 그 반응을 보고자 한 것이다.

주인이 에픽테토스의 다리를 부여잡고 힘을 주기 시작하자 에픽테토스는 평소의 온화한 표정으로 주인에게 넌지시 말했다.

"그렇게 하신다면 제 다리가 부러질 것입니다."

주인은 에픽테토스의 말에 아랑곳 하지 않고 더 세게 힘을 주었다.

'우드득'

끔찍한 소리가 나며 에픽테토스의 다리가 부러져 버렸다.
그러자, 에픽테토스는 침착하게 주인에게 말했다.

"제가 부러질 거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 뒤로 그는 평생동안 절름발이로 살았지만 수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철학자가 되었다.

그는 어째서 외부적인 불행에도 불구하고 그토록 태연하고 의연하게 대처했을까?



1.행복

철학은 우리의 생각보다 보편적이다. 넓은 의미에서 철학을 배운적이 없고 철학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조차도 무의식 적으로 제 각각 나름대로의 철학을 지니고 삶을 살아간다.
그리고, 그런 철학의 목표는 대부분 하나의 큰목표로 귀결된다.

'어떻게 잘 살수 있을까?'

즉, 행복이다.

스토아 철학에서는 평온한 마음(아타락시아)과 좋은 품성(아레테)을 지니면 행복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앞서 에픽테토스는 다리가 부러졌지만 자신의 행복이 다리에 달려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런 상황에서도 평온할 수 있었다.

스토아에서 말하는 평온한 마음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평온함과 매우 다르다. 스토아 철학은 삶에 아무런 장애물이 없는 삶을 평온한 삶이라고 이야기 하지 않았다. 오히려 역경이 있음에도 그것에 지배당하지 않는 것이 행복이라고 보았다.

아래의 이야기는 이런 스토아 철학의 이야기를 잘 담고 있다.

한 나라의 왕이 세상의 화가들에게 '평화'에 대한 그림을 그려오라고 했다.

사람들의 투표로 가장 유력한 후보 그림 두 가지가 뽑혔다.

첫번째 그림은 산들바람이 부는 아름다운 초원에 맑은 날씨와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는 양들이 있었다.
그야말로 평화로운 그림이었다.

다른 그림은 놀랍게도 정 반대였다. 폭풍우가 몰아치고 시꺼먼 구름이 뒤덮히고, 천둥번개가 치는, 그야말로 무시무시한 자연재해가 닥치는 그림이었다.
그런데, 한가지 독특한 점이 있었다. 그림의 조그만 한쪽 구석에 어미새가 새끼들을 품고 있었다.

거센 폭풍우가 몰아치는 밤임에도 새들은 어미의 품에서 새근거리면서 잠을 자고 있었다.

왕은 이 두번째 그림이야 말로 진정한 평화라고 이야기 하며 화가에게 상을 내렸다.

스토아 철학은 말한다. "살아가는 한 삶의 문제는 피할 수 없다. 그러나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의 평온을 유지하는 것은 우리의 노력으로도 가능하다." 고

노예 철학자 에픽테토스가 저술한 <엥케이리디온>에서는 통제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
통제는 스토아 학파를 관통하는 대원칙이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무엇이 우리의 뜻대로 되는가?"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는 통제가 가능한 일과 불가능한 일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그 중에서 스토아 철학은 우리가 통제 가능한 일을 하라고 조언한다.
동료에게 이야기를 더 쉽게 설명하기 위해 로마의 철학자 키케로는 궁수의 비유를 들었다.

궁수가 화살로 목표를 맞춘다고 하자 . 그는 기술을 연마하는 훈련기간, 사용하는 활의 종류 , 활을 겨누는 방향을 통제할 수 있다. 그러나 화살이 활 시위를 떠나는 순간 궁수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활을 쏘는 순간 목표를 맞추는 것은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운명'에 달려 있다.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대체로 그렇다. 당신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치밀하게 치밀한 전략을 짤 수도,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노력을 거듭할 수도 있다. 그러나 목표가 이뤄지는 것은 늘 당신에게 달려있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스토아 철학을 체념의 학문이라 보는 것은 오해이다. 스토아 철학은 이런 운명적 상태에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수용하게 하고, 우리가 통제 가능한 부분에 집중하도록 권장하기 때문이다.
이런 합리적인 점에서 스토아학파는 소크라테스의 정신을 이어받았다고 볼 수 있다.

주여, 제가 바꿀 수 없는 걸 받아들일 수 있는 평온함을 주시고,
제가 할 수 있는 걸 바꿀 수 있는 용기와
그 둘의 차이를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소서
-평온을 비는 기도-



이처럼 스토아 학파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 두 가지로 평가할 수 있다고 말했다.
우리가 통제할수 있는일, 그리고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중립적인 일이다.

여기서 중립은 우리가 선택할 수 없는 일들이다. 우리는 그런 일들에 대해서 우리는 아무런 통제력도 없다.
스토아학파는 이런 중립적 요소들을 우리가 통제할 수 있다고 착각하기 때문에 필요이상의 고통을 받는다고 말한다.

앞서 말했다시피 스토아 철학에서는 평온한 마음을 지녀야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런 평온한 마음을 지니기 위해서는 통제 불가능한 일에 집착하지 말고 가능한 일에 노력을 쏟아야 한다.

그런데, 돈, 명성, 권력은 중립적인 것이다. 여기서 중립적이라는 말의 의미는 돈, 명성, 권력같은 것들은 그 자체로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아서
인간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피해를 입히지도 않는 대상을 의미한다. 일종의 도구처럼, 다루는 사람에 따라서 악해지거나 선해진다고 보았다.

그렇다면 중립적인 이런 것들이 어떻게 악하게변하는 걸까? 바로 그것들에 집착하여 마음의 평온을 잃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돈과 명성 권력에 마음을 쏟고 있었다면 그것을 잃는 순간 우리는 분노하게 되고 이성을 유지하기 힘들게 된다.
바로 그런 상황을 스토아 철학은 악하다고 보았다. 자신이 돈, 권력, 명성에 지배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런 것들을 추구하는게 나쁘다는 말일까? 아니다.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무소유 개념과도 다른 이유다.
오히려 스토아 주의자들은 부, 명성, 권력을 악한 것으로 보지도, 선한 것으로 보지도 않아서
그것을 소유하는 것을 '선호'했다.

역설적이게도 그런 중립적인 것들은 우리를 더 행복하게 만들지도 또 행복을 빼앗아가지도 못하는 중립적인 대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립적인 것들을 소유하되 집착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도움이 되는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스토아 학파는 당대의 다른 어떤 철학들보다. 사회적 참여를 많이 했다. 스토아 철학자들 중에는 황제, 공무원, 저술가,노예, 평민, 상인 등의 넓은 직업 스펙트럼을 가졌다.

실제로 로마의 세네카는 스토아 철학자로서 많은 부를 축적했다.
그러자, 당대의 사람들은 철학자가 재물을 탐낸다고 손가락질 했다.
그 말을 들은 세네카는 사람들에게 말했다.

"내 부가 사라지면, 나는 그 부만 빼앗길 것이오. 하지만 당신의 부가 사라지면 정신을 잃게 될 것이오.
현자의 집에서는 부가 주인을 섬기지만 우매한 자의 집에서는 부가 주인에게 명령을 하지"

또한 스토아 철학자들은 쾌락을 추구하되 그것에 지배되는 것을 경계했다. 특히 쾌락이 과할 때 고통이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우리가 쾌락을 추구하면 할 수록 다음에는 자연히 더 높은 쾌락을 추구하게 된다.

현대 뇌과학은 이를 '도파민'이라는 신경물질로 설명한다. 도박, 마약, 섹스, 음주 등에서 우리가 즐거움을 느끼는 이유는 그 것을 즐길 때 우리 머릿속에서 도파민이라는 물질이 분비되기 때문이다.

과학자들이 진행한 실험에서 쥐의 뇌를 열어 도파민이 나오도록 자극을 주었다. 그러자 쥐는 끔찍한 고통이 동반됨에도 불구하고 더 큰 자극을 요구하였고 도파민이 나오는 버튼을 끊임없이 눌러대었다. 버튼을 누르고 기절하고, 버튼을 누르고 기절하다 결국은 죽고 말았다.

쾌락에 취해 어떤 고통도 마다하지 않은 것이다. 뿐만 아니라 버튼을 누르지 못하게 만들었을 때, 아주 극심하게 고통스러워 했다. 쾌락의 부재가 곧 고통이 된 것이었다.

쾌락으로 몸이 부패하면, 더 이상 아무것도 견딜 수 없다.
고통이 세서가 아니라, 사람이 약하기 때문이다.
-세네카-

평온을 위협하는 마지막 요소는 무엇일까? 바로 고통이다. 뜻밖에도 스토아 철학은 평온을 위협하는 고통과 아픔 또한 중립적 요소로 여겼다. 그리고 우리를 괴롭히는 고통과 아픔은 대부분 우리의 상상력에서 온다고 보았다.

그것에 대한 처방으로 스토아주의자들은 현재를 살라고 했다. 예를 들면 우리가 마라톤에 참여한 선수라고 생각해보자.
마라톤은 일반적으로 42.195km 를 달린다. 그런데 선수가 달리는 매 순간마다. 얼마나 남았는지 생각하고 자신의 몸의 고통에 주목하면 끝까지 완주할 수 없다. 정신적 고통이 극심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때 스토아 학파는 어떻게 우리에게 말할까?

바로 미래를 생각하지 말고 오직 한걸음, 한걸음에 '집중'하라고 가르친다.

먼 길도 한걸음씩 딛다보면 결국에는 결승점에 도착할 수 있는 것처럼, 삶에서 정신적인 고통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지금의 순간에 집중력을 발휘하는 것이라고 조언한다.

인간은 뒤로 미루거나 기억한다. 그는 현재에 살지 않는다.
뒤로 눈을 돌려 과거를 한탄하거나 그를 둘러싸고 있는 풍요로움을 의식하지 못한 채
발끝으로 서서 미래를 내다보려고 한다.
장미처럼 시간을 초월하며 자연과 함께 현재에 살지 않는다면
그는 결코 행복하거나 강해질 수 없다.

-랄프 왈도 에머슨-


이런 중립적 요소를 이해하고 통제할 수 있는 것들에 집중하면 우리는 비로소 자유를 얻는다.
욕망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되면 고통에서도 벗어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스토아철학은 주어진 운명속에서 자유를 추구하는 철학이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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