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의 손이 심히 큰 환난을 그 성에 더하사
성읍 사람의 작은 자와 큰 자를 다 쳐서 독종이 나게 하신지라
-사무엘상 5장 9절-
0. 들어가며
인류사에서는 수많은 병들이 등장한다. 그중 가장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병은 바로 페스트다.
흑사병 펜데믹의 기원은 1330년 중국에서 시작되었다. 초기 감염의 여파로 허베이성 인구의 90%가 흑사병으로 인하여 사망했다. 그 후 몽골의 무역망 확장으로 페스트는 크림반도를 넘어 시칠리아 그리고 프랑스에 이르렀다. 그러나 다른 동양국가와 과 달리 유럽에서는 흑사병이 더욱 위협적이었다. 흑사병은 기존의 체제를 붕괴시켰으며 동양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갔다. 왜 그랬을까?
바로 종교였다.
종교는 기존의 위험한 흑사병을 더욱 치명적인 질병으로 변모시켰다.
1.종교적 사고관이 원인을 흐리다.
감염병이 창궐할 때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그 원인을 명확히 규정하는 것이다. 물, 공기, 설치류, 병충등 매개체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어떠한 경로로 감염되고 전파되는지 알아야 비로소 예방과 병역에 나설 수 있다. 그러나 종교는 이러한 근본적인 원인을 찾는 근본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를 포기했다. 사람들은 그저 '신이 화났으니까'로 일축했다.
종교적 신정적 사고관이 합리적, 이성적 사고관을 억압했다.
이는 직접적인 억압 뿐만 아니라 간접적인 억압을 포함했다. 가톨릭 교회는 신앙뿐만 아니라 과학과 물리학에 대한 지식을 대중들에게 알리지 않기 위해 교회 내부에서 라틴어로 된 서적을 공유하였으며 학교에서는 선생이나 학자가 아니라 성직자가 과학을 가르쳤다. 그러한 상황에서 유의미한 과학적 실험과 과감한 가설을 내세우려는 시도는 가톨릭 내부에서 폐사했다.
2. 십자군 원정에 의해 전파된 페스트
1096년 성지탈환을 내세운 십자군은 예루살렘으로 진격했다. 무려 일곱 차례가 넘는 긴 원정이었다. 원정의 실패와는 별개로 예루살렘에서 돌아온 병사들의 옷과 짐에는 페스트의 병원균을 옮기는 곰쥐가 섞여 들어왔다. 이로 인해 유럽에서는 페스트가 창궐하게 되었다.
그 당시 유럽에서는 삼포식 농법 (농지를 삼분해서 봄에 씨앗을 뿌려 콩과 보리를 재배하고 남은 땅은 휴경지로 두어 지력을 높이는 농법)이 있었고 생산력이 증가하자 남은 인력은 도시로 유입되었다. 도시의 시민이 증가하자 자연스레 흑사병 매개체인 쥐가 빠른 속도로 불어났다.
중세 유럽도시는 적의 공격을 막기 위해 성을 미로처럼 만들었다. 그러다 보니 환기가 잘 되지 않는 공간에 감염병이 빠르게 전파되었다. 거기에 중세에서 많이 건설된 목조 주택은 쥐들이 살기 딱 좋은 환경을 조성했다.
3. 예방을 버리다.
뿐만 아니라 종교는 스스로 예방할 수 있는 기회를 걷어차 버렸다. 16에서 18세기 가톨릭 교회와 프로테스탄트 교회는 서로 자신의 종파에 소속되지 않았던 사람들을 이단으로 몰아 탄압했다. 유럽에서는 거룩한 백성이라는 유대인의 박해가 심해졌다. 성직자들은 자신의 공동체에 속하지 않은 유대인을 흑사병을 몰고 온 장본인으로 여겼다. '유대인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는 유언비어가 퍼져 거리에서는 유대인의 집에 방화를 하거나 유대인을 살해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뿐만 아니라 죄 없는 여성들도 교회에 의해 대량으로 살해당했는데
그중 대표적인 것이 마녀재판이었다. 페스트로 인해 흉흉해진 민심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희생양이었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했다. 마녀는 고양이를 부린다는 소문이 돌면서 그들은 고양이를 보이는 족족 잡아 죽였다. 이로 인해 페스트균을 보유한 쥐가 더욱 활게를 치는 악순환이 계속되었다.
14세기에서 일어난 페스트 팬데믹은 성직자들에게 치명적이게 작용했다. 실크로드를 통해 부를 축적하던 원나라가 약해지며 무역이 위축되었다. 펜데믹으로 인해 인구가 줄자 상류계급 사람들은 살림을 꾸리는 것조차 어려웠다. 일손이 귀해졌다. 성직자의 하인, 장인, 상점 직원 등 노동자들은 이전과 달리 스스로 고용주를 선택하고 임금을 협상할 수 있었다.
귀족들과 성직자들과 노동자의 갑을 관계가 역전되었다.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3 세는 임금을 팬데믹 이전 수준으로 돌리려고 했지만 노동자들은 거부하며 두 세배의 임금을 더 받길 원했다. 임금이 상승하자 문화 여가에 돈을 쓰는 사람들이 생겨났고 기호품을 소비하는 사람이 늘어나 시장경제가 발달했다. 높아진 인건비로 인해 봉건사회처럼 기사를 부리는 것이 불가능해졌고 이에 무력을 갖추기 위해 총기가 농민들 사이에 퍼져나갔다.
어쩔 수 없이 영주는 농민을 영토에 붙잡아두기 위해 농민의 처우를 크게 개선했다. 농노는 임금을 받는 농업 노동자의 신분으로 격상했고 독립 자영농이라는 계급이 탄생했다. 이에 성직자와 귀족들은 신의 이름(왕은 하나님이 선택하신 것)이라는 명목으로 노동자들을 압박하려 했지만 자크라의 난, 타일러의 난 등 농민 집단 반란이 일어나게 되었고 영주들은 차츰 권위를 잃어갔다.
귀족들의 횡포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진 자영농은 대농장주가 되었고 이들은 수확량을 늘리기 위해 새로운 농법 노빅 농법 (보리, 클로버, 밀,순무)등을 적극적으로 도입하려 노력했다. 따라서 18세기 밀 생산량은 14세기에 비해 갑절로 늘었다. 농장주는 자본가로 변했으며 자본주의 발달의 기초를 다졌다.
4.결과
교회는 더욱 처참하게 망가졌다. 당시 중세에는 의학이 발달하지 못했기에 사람들은 그저 신에게 빌 수 밖에 없었다. 페스트 팬데믹이 점점 심해 지자 기도를 하는 사람이 늘었지만 잠시 뿐이었다. 사람들은 교회에 대한 믿음을 잃었다.
오히려 이는 타락한 교회에 대한 천벌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늘었다. 13세기 경에는 스스로의 몸을 채찍질 하는 고행자 무리가 돌아다녔다. 이러한 운동은 농민의 반란과 결합되어 새로운 종교개혁의 기반이 되었다.
또한 지식층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가톨릭 교회는 학교의 역할도 겸하고 있었는데 로마시대 부터 내려온 과학, 철학 등은 대부분 라틴어로 기록되어 있었다. 당연히 그것을 가르치는 것도 성직자들이었다. 모든 지식을 독점하던 가톨릭 교회였지만 페스트로 인해 성직자들이 사망라게 되면서 30개 대학 중 4개가 폐교되었다.
그 사이에 탐구의 열기가 강한 사람들이 교회로 부터 벗어난 독립적인 학술 연구를 추구하게 되었다. 교회는 믿음이라는 지지 기반, 지식이라는 독점성 외에도 권력마저 잃었다. 펜데믹으로 인해 공중위생을 담당하는 관료가 교회의 권위를 넘어섰고 강압적으로 교회를 폐쇄하기까지 했다. 거기에 더해 마틴 루터가 교회의 더러운 온상을 밝히는 95개 조 반박문을 발표했으며 그가 독일어로 번역한 성경은 당시 등장한 활판 인쇄술과 맞물려 성경이 민간에 보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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