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0년에서 760년, 고대 그리스에서 한 여성이 태어났다. 그녀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수학자 중 한 명인 히파티아였다.
그녀의 아버지는 유명수학자 테온으로 늘 딸에게 말했다. "생각할 권리를 누려라, 차라리 틀린 생각을 하는 것이 전혀 생각하지 않는 것보다 낫다." 당시 그리스에서 여성에게는 많은 권한이 제한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아버지는 딸을 한 사람의 온전한 인격체로 대우하였고 어엿한 수학자로 키워냈다.
히파티아는 아버지의 격려에 힘입어 어린 나이에 디오판토스의 <산수론>과 아폴로니우스의 <원뿔곡선론> 프톨레 마이오스의 <알마게스트>에 주석을 달며 자신의 재능을 증명했다. 이것들은 훗날 수학, 기하학, 천문학의 기본 텍스트가 되었다.
테온이 55세의 나이에 일선에서 물러나고도 30살이 된 히파티아는 여전히 승승장구했다. 그녀는 종교를 가리지 않고 모든 사람을 환영하며 지식을 베풀었고 히파티아의 명성을 듣고 전 세계에서 사람들이 찾아와 알렉산드리아는 붐볐다.
그러나 좋은 일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단순히 그녀가 여성이라는 사실이 히파티아에게 불명예를 안겨주었다. 알렉산드리아에서는 히파티아의 처녀성이 주로 회자되는 주제였으며 그녀는 정치적 음모에 휘말려 "히파티아가 마법으로 남성을 홀렸다."는 모함을 받았다.
그런 중 421년에 기독교도와 비기독교도인의 분쟁이 격화되었고, 기독교 집단에서는 히파티아가 자주 조언을 주던 오레스테스를 협박하기 위해 500명의 수도사들은 알렉산드리아를 부수고 재산을 파괴하고 사람을 고문했다. 덩달아 흥분한 기독교도들은 마차를 타고 가던 히파티아를 발견하고 근처 건물로 끌고 가 조개껍데기와 깨진 도자기 조각으로 그녀를 난자해서 죽인 뒤 시체를 불에 던져 버렸다.
그 방식은 당대 최악의 범죄자에게 가해지는 형벌이었다. 물론, 히파티아는 아무런 죄가 없었다.
히파티아의 잔인한 죽음 뒤에도 사람들은 그녀에 대한 조롱은 멈추지 않았다. 5~6세기 영향을 끼친 락자 다마스키오스는 그녀의 옷을 놓고 조롱했고 17,18세기 저술가들은 히파티아를 "알렉산드리아의 대단히 무례한 여교장"이라 표현했다.
찰스 킹즐리라는 기독교 사회주의자는 소설<히파티아>에서 그녀를 발가벗긴 뒤 기독교로 개종시켜 버렸다. 그 뒤로도 오랫동안 히파티아는 누드화로 그려지며 사람들에게 성적 소재로 사용되었다.
그러다 1900년대에 들어서 히파티아의 업적이 재조명되었다. 히파티아는 알렉산드리아의 창부에서 자유 및 신앙의 쇠퇴, 이성과 탐구의 쇠락을 상징하는 인물이 되었다. 현대에 히파티아의 전기를 쓴 에드워드 와즈는 이렇게 평했다.
"히파티아의 영웅적 면모는 삶의 마지막 순간에 겪었던 잔혹성을 감수하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우리가 매일 살아가면서 마주친 미묘한 장벽을 극복하는 데 있다."
수학의 역사는 광기의 역사와 불가분의 관계다. 진리를 밣혀내는 수학의 관성이 본능적인 인간의 광기에 저항하는 일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수학의 과정과 역사를 되돌아 보느는 과정은 '현대'라는 것이 단순히 시간의 결과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의 지적 노력과 헌신의 산물임을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불리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생각한 권리를 누리는 사람, 그리고 광기를 극복하여 인류사에 지대한 공헌을 한 히파티아의 행보는 인류를 이끌어온 수학사 그 자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