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딸기라는 단어는 달지 않다.
일찍이 철학자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인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내가 쓰는 언어의 한계가 내 세계의 한계를 규정한다.
<언어가 우리의 사고를 형성하는 법> 이라는 TED강연에서는 지구상에 존재하는 7000여 개의 언어가 인간의 정신의 단면을 보여준다고 주장했다. 예를 들어 호주 원주민 쿠크 쎼이요르 부족은 모든 것에 동서남북 같은 방향 지시어를 포함한다.
실제로 이들은 인간이 가능할 것이라 여긴 이상으로 방향감각이 발달했다.
또 다른 언어는 밝다. 어둡다 두 단어밖에 없어서 색상의 경계에 있는 색을 표현하지 못한다. 그와는 반대로 러시아의 경우 밝은 파랑색 'goluboy'와 어두운 파란색 'sinly'등 미묘한 색의 변화에 이름을 붙여 구분한다.
이러한 과학적 연구에 덧대어 생각할 때 "언어는 세계의 한계를 규정한다." 라는 비트겐슈타인의 말은 얼핏 사실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주장은 사실일까?
나는 반쪽짜리 진실이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딸기'라는 단어는 딸기가 지닌 모든 속성을 나타내지 못한다. 딸기라는 단어는 붉은색을 표현하지 못한다. 딸기의 달콤한 맛과 혀 속에서 흩어지는 감칠맛을 표현하지도 못한다.
딸기라는 두 글자 단어 뒤에 표현되지 않은 달콤한 맛, 감칠맛, 상큼한 등등 수많은 부연설명이 들어가고 나야만 딸기라는 두 글자의 단어를 단락적으로 나마 표현할 수 있다. 뿐만 아니다. 사람마다 딸기 대한 다른 관념을 가지고 있어 누군가는 초록 딸기가 누군가에게는 노란 딸기가 딸기일 수도 있다.
요컨대 언어는 그 한계가 명확하다. 언어로는 세계를 표현할 수 있을지언정 담을 수는 없다
마을의 꼬맹이에게 <천자문>을 가르치는데, 읽기 실허함을 야단치자 이렇게 말하더군요.
"하늘을 보면 파랗기만 한데 하늘 천 글자는 푸르지가 않으니 읽기 싫어요."
이 아이의 총명함이 글자 만든 창힐蒼頡을 기죽일 만 합니다.
-박지원 <창애에게 답함>-
2. 독서는 궁구 하는 것
마찬가지로 책을 읽는 행위는 어떨까?
책또한 언어와 마찬가지로 불완전한 세계를 담고 있다. 그런데 정말 책이라는 수단이 우리에게 진정한 세계가 아닌 단편적인 가짜 세계를 보여주는 것일 뿐이라면, 우리가 글자를 읽는 것은 그저 가짜 세계를 유영하는 공상에 지나지 않는다.
주자학을 정립한 쓴 주자는 이러한 점을 지적하며 "책은 때때로 공부하는 사람에게 함정이 될 수 있다."라고 언급했다.
맥락상 주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명확하다.
책은 그저 읽기만 해서는 아무것도 아니다는 것이다.
우리의 이해가 독서를 통해 쓴 사람의 마음에 닿지 못한다면, 독서란 단순히 글자를 읽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제 한결같이 문자에만 빠져서 이 마음 전체를 온통 책 위로만 내달리게 하고, 자신의 존재마저 알지 못하였으니, 비록 책을 읽은들 무슨 보탬이 있으랴
-주자-
따라서, 우리는 글을 읽지 말고 뜻을 읽도록 의식적으로 노력해야 한다.
'뜻을 읽는다'는 것은 단순히 문장을 훓고 지식을 쌓는 것을 넘어 쓴 사람의 마음을 엿보는 것 의미한다.
회음우 한신의 일화는 이러한 읽기의 좋은 예시다.
한 고조 유방은 회음후 한신이 조나라를 무찌르게 하고자 했다. 이에 한신은 배산임수의 병법을 따르지 않고 오히려 병력을 강가에 두어 싸우게 했다. 이에 달아날 곳이 없는 병사들은 목숨을 걸고 싸워 승리를 거두었다.
승리를 축하하는 자리에서 부하들은 한신에게 물었다.
"병법에서는 진을 칠 때 산을 등 뒤에 두고 물을 앞에 두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장군께서는 도리어 물을 뒤에 두고 진을 치셨으니 이는 무슨 진법입니까?"
이에 한신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것 역시 병법에 나와 있는데 자네들이 몰라서 하는 말일세 죽을 땅에 서서야 살 수 있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우리 병사들은 급히 모아놓은 오합지졸들이니 싸움이 나면 다 도망갈 것 아닌가? 그래서 죽을 각오에 임하라고 '배수진'을 친 것일세"
진정한 독서는 '이 글을 어떻게 썼을까?' 하는 1차원적 생각에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가 이 사람은 '어떤 마음으로 이 글을 썼을까?'에 초점을 맞추고 읽는 행위다. 독서란 단순한 문장을 넘어 글을 쓴 저자의 마음 속 깊은 곳으로 들어가 하나가 되는 체험을 하는 것이다.
옛사람들은 이러한 행위를 '궁구(窮究)한다'라고 불렀다.
궁구하지 않는 독서는 글자를 읽고 외우는 기계적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책을 볼 때에는 마음속으로 그 문장을 외면서 그 뜻을 곰곰이 생각하여 찾되, 주석을 참고하고 마음을 가라앉혀 궁구 해야 한다. 만일, 한갓 눈만 책에 붙이고 마음을 두지 않으면 또한 이득이 없다.
-홍대용 <여매헌서>
물론 이는 쉽지 않다. 독서를 통해 저자와 온전히 하나가 되는 것에는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다.
3.궁구하는 독서법
다음은 궁구 하는 독서의 방법이다.
① 사심을 버려라
사심을 가지고 독서를 하면 저자의 저의를 볼 수 없다. 본래 저자의 뜻을 이리저리 왜곡하여 주먹구구식으로 끼워 맞춰 헤아림이 깊지 않은 사람을 조종하는 잡배로 전락할 뿐이다.
"내가 일찍이 그대의 독서를 살펴보니 매번 자기주장을 을 내세우되 반드시 깊고 높기만을 구하려 든다. 그 넌 까닭에...(중략)... 스스로 이기려만 들뿐 뜻을 겸손히 해서 마음을 비워 받아들이는 뜻이 사라지고 만다. 심술에 해가 될 뿐 아니라 덕에 나아가는 큰 공부에도 방해가 될 것이다."
-주자-
유학자들이 몸을 정갈하게 하고 마음을 깨끗이 한 후에야 독서를 한 이유는 사심을 담지 않기 위해서였다. 자기와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을 만나면 우리의 자아는 마구 날뛰기 시작한다. 그러한 자아를 가라앉히고 겸손한 자세로 책을 읽어야 한다.
② 독서에 왕도는 없다.
독서는 서둘러서 하면 안 된다. 오히려 시간을 가지고 느긋하게 읽어 내려가야 한다. 세간에서 말하는 속독의 함정에 빠지지 말고 한 글자 한 글자씩 정독하며 읽는다.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으면 다 읽고 돌아와 다시 읽으면 된다. 깊이 알고 싶은 부분이 있다면 그 구절을 외워두었다가 잠잘 때나 걸을 때나 떠올리며 이리저리 궁리하면 된다.
배우려고 책을 읽으려면 모름지기 번거로움을 참고 세밀하게 이해해 나가야 한다....(중략)..... 오늘 한 겹을 벗겨 내어 또 한겹을 살피고, 내일 한 겹을 제거해서 또 한겹을 이해한다.
-양응수 <독서법>
이처럼 책을 읽는 일은 번거롭다. 때때론 어렵고 괴로운 일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처음 춤을 추는 법을 배우는 것처럼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러운 경지에 이른다. 그때야 말로 무한한 즐거움을 맛볼 수 있다. 따라서 그때까지는 천천히, 급하지 않게 공부하는 것이 핵심이다.
③ 독서는 행위로써 완성된다.
불교에서는 수신을 통해 마음을 다스리고 유교에서는 학문을 마음을 다스렸다. 유교는 여기서 더 나아가 산 속이나 골짜기가 아닌 현실세상에서 그 도를 펼침으로서 세상을 다스림과 동시에 자신을 수양했다.
한 구절을 보고 나면 문득 이를 알아야 하고, 한 구절을 알고 나면 이를 행해야 한다. 한 가지를 알아 한 가지를 행하면 발과 눈이 둘 다 나아가게 된다.
-홍대용 <자경설>-
독서를 읽고 한 구절이라도 현실에서 행동하지 않는다면 헛공부를 했다는 말이다. 이는 지식을 통해 자기주장을 남에게 내세우라는 말이 아니다. 바깥이 아니라 수양하듯 스스로의 행위를 점검하고 어제보다 더 나은 삶을 살아야만 독서는 진정으로 빛을 발한다.